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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의 프리킥]박근혜 독트린

입력 | 2016-02-18 03:00:00


허문명 논설위원

어제 아침 일찍 70대 전직 장관으로부터 이런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남한 국가원수 입에서 ‘(北) 체제 붕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방법론 유무를 떠나 국민과 국제사회를 향해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다. 나도 들으면서 섬뜩했을 정도였다. 조간신문 1면 제목 크기가 더 컸어야 했다.”



북핵폐기 결기 보였다

대통령 국회 연설이 있었던 그제 저녁 또 다른 전직 장관, 은퇴한 언론사 사장, 중견 학자, 의사들까지 두루 망라한 모임에서도 “속이 후련했다”는 게 중론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다들 ‘박근혜’를 찍긴 했어도 잇단 인사 실패와 불통 리더십에 “정말 이렇게 못할 줄은 몰랐다”며 실망을 감추지 않았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대통령 칭찬을 쏟아냈다. 리얼미터 긴급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3명 중 2명이 “대통령 연설 내용에 공감한다”고 했다.

대통령은 이번 연설에서 “북핵은 실전 배치될 것이므로 ‘파국’을 막으려면 ‘근본적’ 해답을 찾아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한 때”라며 현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했다. “개성공단 가동 중지는 제반 조치의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보다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한 대목들에서는 장기 전략하에 북핵을 반드시 폐기시키고 말겠다는 결기가 느껴졌다.

김정은이 숙청한 고위 간부들 이름을 일일이 열거한 것도 눈길이 갔다. 지구상에서 보기 드문 북 정권의 야만성을 만천하에 드러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지금 우리의 자유 인권 번영의 과실을 북녘 주민들도 함께 누리도록 하겠다”는 말에는 우리가 가야 할 통일의 내용과 방향성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신뢰 프로세스’ 정책의 폐기 정도가 아니라 지난 20년간 대북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선언했다는 점에서 가히 ‘박근혜 독트린(doctrine·외교안보 노선의 기본 지침)’이라 할 만하다.

국가안보가 절체절명인 상황에서 밤잠을 설치고 있을 대통령은 요즘 누구를 가장 많이 생각할까.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일 것이다. 박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화가(畵家) 아버지를 둔 자식이 미적 감각이 개발되듯 (퍼스트레이디 시절) 아버지를 수행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며 ‘하려는 일이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그것을 풀어갈 만한 실마리는 늘 아버지의 충고에서 나왔다’고 적고 있다. 그제 연설에서 “더 이상 국제사회에 의존하는 무력감을 버리고 우리 스스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대목도 평소 자주국방을 외치던 아버지를 연상케 했다.

박 대통령은 개성공단에서 철수하기 전부터 이미 장래의 실행 플랜과 전략을 설계해 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야에서 거론되는 다음 대통령 후보들도 떠올려 보며 ‘누가 차기 정권에서 북핵에 맞설 수 있을까… 내 임기 동안 근본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태산보다 무거운 사명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란 외로운 자리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5년 9월 노무현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담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통령이 어떤 자리인지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봐서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권력자라 하지만 사실 무척 외로운 자리입니다. 하지만 대통령마다 그 시대에 져야 할 책임이 있으므로 노 대통령께서는 노 대통령 시대의 사명을 잘 생각하고 마무리하셔야 합니다. … 국민을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이나 대통령이란 없습니다.”

박 대통령은 과연 시대적 사명을 잘 생각하고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은 지금 새로운 시작 앞에 서있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