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26호] 부장님 취향 따라 8090 가요 배우는 신입사원…‘못 놀면 감점’ 직장인 특기 과외 붐
“리듬을 느껴야 동작이 쉬워요.” “어제 과음해서인지 턴이 잘 안 되네요.”
2월 6일 오후 4시 서울 역삼동 제이댄스학원에는 30~50대 남녀 10여 명이 모였다. 설 연휴를 앞둔 주말인데도 수강생 전원이 출석했다. 이들은 댄스그룹 ‘노이즈’가 1995년 발표한 노래 ‘상상속의 너’에 맞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마에 땀이 맺히도록 춤을 연습하는 수강생은 모두 직장인이었다.
그중 춤 실력이 유독 뛰어난 천모(32) 씨는 3년 전 회사에 취직하면서 댄스학원에 등록했다. 입사 후 첫 체육대회 때문이었다. 그때 신입사원들의 장기자랑 경연대회가 있었는데, 천씨가 소속된 마케팅부서 선배들이 “우리 팀이 꼭 이겨야 한다. 이왕 하려면 잘하라”고 당부했다. 어떤 선배는 “학예회가 아니지 않느냐. 회장님이 좋아하도록 전문적인 춤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천씨는 입사 동기들과 두 달 동안 연습한 군무를 선보여 선배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탬버린 댄스’ 한 달 속성 레슨도
서울 역삼동 제이댄스학원에서 직장인 수강생들이 춤 연습을 하고 있다. 회사원 천모(왼쪽) 씨는 “회식 때 잘 놀아야 상사들에게 인정받는다”고 말했다. 이상윤 기자
회식용 노래와 댄스 스타일도 흐름을 탄다. 3~4년 전 사원 또는 대리급 직장인이 노래방에서 주로 부르던 곡은 박상철의 ‘무조건’, 싸이의 ‘강남스타일’,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 이문세의 ‘붉은 노을’ 등 신나는 노래들이었다. 과장급 이상은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 같은 발라드곡을 추가해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1980~90년대 유행가로 바뀌었다는 것이 ‘노래방 댄스’를 가르치는 강사의 설명이다. 권혁진 대표는 “1년 전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이 1990년대 가수들의 공연을 선보이면서 8090세대의 유행가가 큰 인기를 얻었다. 그 시절 젊은이들이 현재 40, 50대 차장·부장급이기 때문에 이들의 호응을 얻고자 8090 가요 댄스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댄스를 활용하려는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일반 연습생보다 더 열심히 배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노래에 자신 없는 직장인은 음치교정학원에 다닌다. 직장인 김모(36·여) 씨는 매주 수요일 업무를 마치면 경기 수원에 있는 ‘음치기박치기’ 학원으로 달려간다. 지난해 어느 날 회사 회식 자리에서 김씨는 노래 때문에 굴욕을 겪었다. 한 선배가 김씨에게 “노래 좀 해봐라”고 해서 노래를 하고 있는데 아무도 김씨 노래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던 것. 또 모두 흥겹게 노래하는 분위기에서 김씨와 다른 동료가 섞이지 못한 채 앉아 있자 누군가 “너희 둘은 다른 데 가서 놀아라”고 말해 자존심에도 상처를 입었다. 강습 외 시간에도 학원에서 노래를 맹연습하는 김씨는 “1년 동안 열심히 연습해 연말 회식 자리에선 직장 선후배들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직장인 한건희(25) 씨도 노래에 자신이 없어 1년 전부터 매주 일요일 한 시간 반을 할애해 강습을 받고 있다. 한씨는 “아직 회사 직원들 앞에서 노래한 적은 없지만 언젠가 기회가 오면 멋지게 불러 주목받고 싶다”고 말했다.
부장님도 후배들 눈치 보며 트로트 안 불러
경기 수원 음치기박치기 학원에서 보컬강사 이광현(왼쪽) 씨가 직장인 수강생 한건희 씨에게 기초 발성을 가르치고 있다. 사진 제공 · 음치기박치기
회사에서 돋보이기 위한 장기자랑을 사적으로 배우는 열풍에 대해 ‘경쟁에 내몰린 현대인의 씁쓸한 초상’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직장인이 회사에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노래나 춤 같은 장기는 매우 개인적인 요소인데 이를 공적으로 표출해야 한다면 강박관념에 시달릴 수도 있다. 자신을 진정 기쁘게 하는 특기는 바람직하지만 인위적이고 억지스러운 노력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조언했다.
김지현 객원기자 bombom@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6년 2월 24일~3월 1일자 102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