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기자
‘한심한 양반’ 논란이 21세기에 다시 등장할 줄 누가 알았을까. 새누리당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은 4·13총선에서 솎아낼 현역 의원을 “양반집 도련님”에 비유했다. 이 위원장은 “일한 사람이 갖다 바친 것을 챙겨 먹기만 하는 이가 양반”이라고 했다. 현역 의원 중 저성과자를 걸러내겠다는 이 위원장의 주장은 백번 옳다. 임기 4년간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다면 양보의 미덕이라도 보여주는 게 최소한의 양심이다.
공천관리위원인 김회선 의원(서울 서초갑)은 지난해 10월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이런 고백을 했다. “당선되고 1년 정도 지나 한 유권자를 만났더니 ‘어, 남자네’라며 놀라더라. 새누리당 후보면 무조건 찍어주는 곳에서 재선 욕심을 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불출마 선언문에서 “열정과 능력이 뛰어난 이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애국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새누리당 ‘표밭’에선 현역 의원 평가가 더욱 엄정하게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김 대표와 친박(친박근혜)계는 서로를 향해 “(공천 개입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맞섰지만 정작 국민이 용납하지 않는 건 오만함이다. 수많은 선거에서 입증된 철칙이다. 2008년 총선은 세계 선거사에 남을 만한 ‘오만함의 심판장’이었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싹쓸이를 하는 와중에 유권자들은 이재오 이방호 정종복 등 이명박 정부의 실세들만 콕 찍어 낙선시켰다. 그들은 억울해하지만 민심이라는 게 그렇게 소름 끼치게 무섭다.
친박계가 조직적으로 나선 ‘진박(진짜 친박) 마케팅’이 역풍을 맞은 것도 같은 이유다. 박근혜 대통령이 ‘선거의 여왕’이 된 건 자신의 정치적 이해보다 당의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이다. ‘눈물’과 ‘붕대 투혼’으로 상징되는 헌신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계보원을 자처하는 이들은 가장 당선되기 쉬운 곳에서 박근혜 이름을 파는 가장 편한 선택을 했다. 여기에 무슨 헌신이 있고, 감동이 있나. 또 다른 오만함으로 비칠 뿐이다.
감동이 없기는 김 대표의 ‘상향식 공천’도 마찬가지다. 김 대표의 말대로 “상향식 공천이 정치 개혁의 완결판”이 되려면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 포기가 필수조건이었다. 최소 6개월 전 당협위원장직을 내려놓고, 당원 명부도 미리 줘 ‘경쟁의 공정성’을 담보해야 했다. 오늘부터 정치 신인들에게도 투표권이 있는 책임당원 명부를 나눠 주겠다니 공정성은 이미 물 건너갔다. 들러리만 서게 될 정치 신인들이 등을 돌리면 새누리당의 과반 승리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전망도 나온다. ‘상향식 공천’이 아니라 서로에게 상처만 입히는 ‘상해(傷害)식 공천’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정치에 정답은 없다. 끝없이 타협할 뿐이다. 김 대표와 이 위원장은 저성과자 낙천과 상향식 공천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민심을 넘어설 명분은 없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만날 필요가 없다”며 치킨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과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없었다면 새누리당은 도대체 어쩌려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