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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칠레까지… 애국열정 불태운 각고의 여정

입력 | 2016-02-26 03:00:00

홍언 한시집 ‘동해시초’ 통해 본 남미 독립운동 모금활동




“태평한 이제는 오가는 사람조차 없어/지는 낙엽 푸른 이끼 속 사립문만 반쯤 닫혔네.”

미주 독립운동가 홍언이 1919년 3·1운동 뒤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며 남미를 순행하다 1922년 페루 리마 북쪽 우아초에 있는 페루 독립기념관을 방문해 남긴 한시 중 일부다. 이 시는 이번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확인한 동해시초(東海詩초)에 담겨 있다. 시와 함께 쓴 해설을 보면 홍언은 페루의 늦가을인 3월 말 이곳을 방문했다. 페루의 독립기념관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한인 독립운동가의 감회가 드러나 있다.

동아일보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가로 14cm 세로 21.5cm 크기의 동해시초에는 34쪽에 걸쳐 홍언의 한시 96수가 38제(題)로 나뉘어 담겼다. 페루 독립기념관을 소재로 한 3수, 페루의 수도 리마의 성당을 소재로 한 ‘리마 천주교사’ 2수, 리마의 풍경과 역사에 대한 시 등 남미 순방 경험과 감회가 담겨 있다.

연구소는 동해시초와 미주 한인신문 ‘신한민보’ 기사, 이승만 전 대통령이 주도한 구미위원부에 홍언이 보낸 편지 등을 분석해 홍언이 미국에서 칠레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종횡하며 모금 활동을 벌인 사실과 그 행적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3·1운동 소식이 1919년 3월 9일 미주에 전해지자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국민회) 중앙총회는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 마련에 나선다. 국민회는 이민 역사가 오래돼 자본력이 있던 화교(중국인)도 모금 대상에 포함시키기로 그해 4월 결의한다. 미주 한인이 당시 1만여 명에 불과하고, 대부분 가난해 모금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공부한 적이 있어 중국어와 한문에 능통했던 홍언 등 3명이 화교위원으로 임명됐다. 홍언은 중화회관 회장과 중국인신문사의 소개장을 가지고 미국 로키 산맥 서부 지역에서 모금 활동을 벌였다.

홍언은 1921년 6월 초부터 1년여에 걸쳐 남미 순행을 시작한다. 김도형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책임연구위원(국외사적지팀장)은 “당시 중남미 화교들에게 고려인삼을 팔던 한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남미에서도 자금을 거둘 수 있겠다고 판단한 듯하다”고 설명했다. 홍언은 미국 뉴욕에서 배를 타고 파나마와 에콰도르 과야킬을 거쳐 8월 초 리마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순행 초반에는 모금 성과가 비교적 좋았다. 리마에서 화교들은 홍언을 ‘한국지사 홍언’으로 부르며 환영했고 중국 국민당 지부는 100원을 냈다. 홍언은 현지 중국어 신문에 한국의 참상에 관한 기고도 했다. 신한민보는 홍언의 활동에 대해 “중국인들이 동정을 보이며 의연금을 냈다”고 보도했다.

9월 리마를 떠나 12월 칠레 북부에 도착한 홍언은 중국 국민당 이키케 분부(分部)에서 칠레 은으로 8000원을 받았고, 공채 판매를 통해 2000원을 모금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화폐가치에 대한 연구는 추가적으로 필요하다는 게 김 책임연구위원의 말이다.

홍언은 이후 안토파가스타와 발파라이소를 거쳐 칠레 중부에 있는 수도 산티아고까지 가는 도중에는 모금 성과가 썩 좋지 않았다. 홍언은 각지 화인(華人)의 생활이 심히 곤란하여 모금 경비도 부족하다는 취지의 보고를 구미위원부에 올렸다. 당시 쑨원(孫文)의 국민당이 북벌을 위한 군자금을 모으고 있던 것도 영향을 줬던 것으로 분석된다.

홍언은 이듬해인 1922년 1월 12일 다시 페루 리마로 돌아오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모금하다가 페루독립기념관이 있는 우아초를 거친다. 페루 독립기념관을 다룬 한시는 이때 쓴 것이다.

홍언은 4월 초순 에콰도르 과야킬에서 마지막 힘을 쏟는다. 그는 “과야킬은 화인이 약 3000명이며 부상(富商)이 많다고 하니 최후의 성적을 이곳에 희망을 둔다”라고 보고했다. 이후 홍언은 멕시코 등을 거쳐 미국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김 책임연구위원은 “당시 미주 지역에서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미주 지역을 ‘독립운동의 젖줄’이라고 불렀다”며 “홍언이 모금한 돈도 대한인국민회, 구미위원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였다”고 설명했다.

동해시초에는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열사를 기린 시도 10수씩 담겨 있다. 또 ‘나라 없이 이십 년이 되는 섣달 그믐날 저녁에 회포를 쓰다’라는 제목의 연작시 24수 중 제11수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3·1운동을 소재로 했다.

“하북에서는 정거(停車)한 이등박문을 척살하였건만/한양에서는 선언서를 전한 소녀의 양손이 잘렸네/영용(英勇)에는 애초부터 묵적(墨跡)의 오염은 없나니/천추 두고 그의 주검 유해마저 향기롭네.”

홍언은 이후 북미 지역 국민회 총무·부회장 등으로 일하며 한중 합작을 통한 항일 투쟁에 힘썼고 주미외교위원부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1951년 3월 미국에서 사망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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