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심이의 기적… 탈북 소녀, 명문대 입학까지]
수강신청 방법, 학과 소개, 기숙사 안내…. 귀가 쫑긋 섰다. 교수님들이 하나씩 이야기할 때마다 혜심이(22·여·사진) 가슴이 콩콩 뛰었다. 정말 한국인이 된 것 같았다. 4일 혜심이가 앉아 있던 방에는 ‘이화여대 재외국민과 외국인 특별전형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7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딱딱딱딱…. 잇소리가 경비대에까지 전해질까 봐 몸이 더 떨렸다. 10월이지만 배꼽까지 차오른 강물은 살짝 얼어 있었다. ‘저쪽에만 가면 엄마가 있을 거야.’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태국 국경 앞에서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 때문에 붙잡혔다. 라오스에 있는 감옥은 12월인데도 따뜻했다. 하지만 몸은 두만강을 건널 때처럼 떨렸다. 한국에 들어온 건 그로부터 3개월 뒤였다.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2010년 9월 사회로 나올 때 걱정은 하나였다. 일반 중학교에 가서 따돌림당할까 두려웠다.
초중고교에 재학 중인 탈북 학생은 2008년 966명에서 지난해 2475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들은 언어와 학업, 편견에 부딪혀 적응을 어려워한다. 오늘의 혜심이도 없었을지 모른다. 학교와 지역사회의 관심이 없었다면….
▼ 배고픔보다 간절했던 공부… 두만강을 건넜다 ▼
저 멀리서 웃으며 달려오는데 한눈에 ‘저 아이가 혜심이구나’라고 알 수 있었다. 혜심이를 만나기 전 상산고 교사들로부터 “우리 혜심이는 해피 바이러스” “어디에 내놔도 자신 있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함께 이야기하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새내기 화장법’을 찾아 연습했다는 혜심이는 누가 봐도 평범한 이 나라 여학생이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잠이 안 왔다. 1분 1초도 안 자고 꼴딱 밤을 새워도 시간이 모자랐다. 친구들보다 늦은 2년…. 아니, 정확히는 11년이었다. 혜심이가 풀 뽑고 밭을 갈 때 이곳 친구들은 학교에 있었다.
첫 수업 날. 무슨 과목을 배웠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가슴이 미친 듯 쿵쾅거렸다는 느낌만 기억날 뿐이다. 선생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분명 한국말이었지만. 칠판을 보는 혜심이의 강렬한 두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슥슥슥 연필이나 볼펜이 노트 위를 바쁘게 오가는 소리가 앞뒤에서 들렸다.
꼴찌는 각오했었다. 어렵겠지만 열심히 하겠다고, 굳은 의지를 갖고 온 학교였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혼자 공부할 때면 책상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대체 내가 왜 여기 앉아 있을까?’
모든 과목이 어려웠지만 혜심이 성적표에 최악으로 적힌 건 늘 국어였다. ‘그래도 말은 알아들으니까’라고 생각했는데 국어는 혜심이 노력에 보답하지 않았다. 눈으로 읽을 수 있고 귀로도 들리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 머리와 가슴이 이해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배경 지식을 쌓아온 친구들과 갑자기 한국에 떨어진 혜심이의 차이였다.
한국에 와서 처음인 게 대부분이지만 특히 영어가 그랬다. 경북 포항 창포중에 2학년 2학기부터 다닌 혜심이 곁에는 늘 단어장이 있었다. 밥 먹을 때, 화장실 갈 때…. ‘엔-이-이-디.’ 여기 학생이라면 need를 ‘니드’라고 읽으며 뜻을 암기했을 터지만 혜심이는 오직 알파벳만 읽을 수 있었다.
큼직한 글씨에 한글과 그림이 적절히 섞여 있는 중학교 영어 교과서도 읽기 버거웠다. 그런데 상산고 영어 책(부교재)에는 한글이 하나도 없었다. 셜록 홈스 등 친구들은 자라면서 한 번쯤 읽어본 내용이고, 문장을 훑는 즉시 무슨 뜻인지 해석해냈다. 혜심이에겐 한 단어 한 단어가 높디높은 장애물이었다.
선생님 말이 외계어처럼 느껴지는 건 수학도 마찬가지였다. 수학 문제 앞에서는 늘 얼음 상태였다. 북한을 탈출할 때 쉴 새 없이 주변을 살피던 눈동자도, 불안에 덜덜 떨던 손도 수학시간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혜심이의 하루 공부 계획표에는 수학이 늘 10시간이었다. 주말, 도서관, 혜심이 책상 위에는 달랑 수학 책 한 권만 놓여 있었다.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든 엑스든 표시되는 문제가 10개도 안 되는 날이 많았다.
젖을 먹어야 하는 아기에게 밥을 먹이는 것. 숟가락 젓가락 중 어떤 걸 써야 할지도 가르치지 않고 일단 밥만 먹게 한 것.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혜심이는 자신이 한 공부가 딱 그 꼴이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부터 늘 발등의 불을 끄기도 바빴다. 도덕 사회 체육 국어 영어 수학…. 가릴 것 없이 일단 달달달 외웠다. 어떻게 해서든 평균 점수를 올려야 하니까. 잘못된 줄 알았지만 달리 방법도 없었다.
남북하나재단의 ‘2014 탈북청소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탈북 청소년 중 48%가 학교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로 ‘학교 수업 따라가기’를 꼽았다. 다음은 문화·언어 적응(14.9%), 친구관계(8.0%) 등이었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탈북 학생의 학업중단율은 2.2%다. 2008년 10.8%였던 것에 비하면 많이 줄었지만 일반 학생의 학업중단율(0.8%)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혜심이가 이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탈북 학생들이 교육과정에 적응하기 어려워한다는 점이다. 탈북 학생의 학업중단율은 초교는 0.2%지만 중학교 2.9%, 고교 7.3%, 대학 9.8%로 올라간다. 혜심이에게는 보통의 탈북 학생과 어떤 다른 점이 있던 걸까.
꼴찌를 각오한 여정의 시작
중학교 3학년 8월 말, 혜심이 앞에 학교 소개 책자가 여러 권 놓였다. 담당 형사와 혜심이네 집을 찾아온 한 노신사가 내민 것이었다. 학생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책자는 온통 영어로 돼 있었다.
“우리 상산고는 전국 단위 자율형사립고인데 공부 잘하는 애들만 모인단다. 매년 50∼60명은 서울대에 가니까 네가 와서 꼴찌만 안 해도 정말 잘하는 거란다.”
임현섭 교감(2014년 퇴임)이 말했다.
자사고? 처음 들어보는 말에 혜심이는 눈만 끔뻑끔뻑거렸다.
임 교감은 덧붙였다. “딱 한 가지, 학생들이 공부도 잘하고 형편이 좋은 경우가 많은데…. 그런 걸로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혜심이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바로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전혀 신경 안 써요.”
임 교감이 웃었다. “공부하려는 열정은 충분한 것 같으니 오렴. 결정은 네 몫이다. 학비 걱정은 전혀 하지 말고.” 그는 다시 오겠다고 했다.
혜심이는 양손 검지만으로 키보드 위에 ‘ㅅ ㅏ ㅇ ㅅ ㅏ ㄴ ㄱ ㅗ’라고 쳤다. ‘학생들이 영어로 뮤지컬을 하잖아? 입학생 성적이 상위 3%(중학교 졸업 성적 기준)? 나는 상대가 안 될 텐데 괜히 가서 힘들지 않을까?’
잠시 머뭇거리던 혜심이 손이 빠르게 검색 창을 닫았다.
‘여기서 평생 살 거고 힘든 날이 더 많겠지. 공부는 분위기가 반이잖아. 어차피 경쟁은 안 될 테니 친구들에게 배우자는 마음으로, 한번 가보자.’
진학을 결심한 혜심이 전화를 받은 임 교감이 수학 영어 교사를 데리고 다시 찾아왔다. 포항으로 가며 그가 두 교사에게 말했다.
“이 아이를 데려오면 당신들이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겁니다. 당연히 입학 성적은 꼴찌겠지만 3년 동안 어떻게 잘 키워낼 수 있을지 연구하세요.”
2008년부터 상산고 교사들 지갑에는 전국 각지로 향하는 고속버스와 기차 승차권이 쌓여갔다. 각지의 ‘숨은 진주’를 찾으러 다니는 거였다. 임 교감 서랍에는 학생이 거주하는 경북 울릉도에 다녀오느라 끊었던 왕복 배편 영수증도 들어있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지 못한 소외계층 아이들도 일말의 가능성만 보인다면 데려다 키우기 위해서였다. 공부로 아이들의 삶과 세상을 바꾸게 하자는 취지였다. ‘수학의 정석’으로 번 돈으로 1981년 상산고 문을 연 홍성대 이사장의 뜻이었다. 어려서 어렵게 공부한 기억 때문에 경쟁력 있는 사학을 세우자고 결심했던 그였다.
그런데 유독 탈북 학생은 찾지 못했다. 어느 날 홍 이사장은 대구지방경찰청에서 장학금을 받은 학생 중 탈북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마침 대구에서 연수를 받고 있던 임 교감이 혜심이를 찾아갔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수업 시연을 해본 교사들이 말했다. 하지만 임 교감은 포항에 두 번 더 갔다. 당시 혜심이 담임교사가 말했다. “지난해 처음 본 시험(2학년 2학기 중간고사)에서 400명 중 280등이었는데 벌써 100등 넘게 올랐어요. 공부는 평생 거의 처음이라는데 대단한 거죠.” 반 친구들도 이야기했다. “혜심이요? 걔 진짜 지독해요.” 학교로 돌아오는 임 교감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내 이름을 모두가 알게 할 거야!”
혜심이는 “나를 만든 건 절반 이상이 선생님과 친구들”이라고 말한다. 상산고 교사들은 혜심이에게 개인 지도를 해주려고 점심을 허겁지겁 먹었다. 친구들과는 때로 기숙사 사감 선생님 눈을 피해 컵라면을 나눠 먹으며 깔깔거리는 등 자매처럼 지냈다. 지난해 2월 졸업식에서 3학년 담임 박순식 교사(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와 혜심이(오른쪽), 친구들. 이혜심 씨 제공
입을 앙다물어도 눈앞은 흐려졌다. 선생님들이 점심시간 휴식도 포기하고 방과 후 개인과외를 해주는데, 백번도 넘게 설명해주는데 왜 이 모양일까…. 친구들이 자는 동안 공부해도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자책이 늘어갔다. 자기 시간만 자꾸 도망가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혜심이는 세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 배가 불러서, 좋아서 이러는구나. 밥도 다 주지, 선생님들이랑 친구들이 다 챙겨주지, 공부만 하면 되는데 힘들다는 게 말이 돼?’라고 생각했다.
불과 3년 전 일이다. 종일 닭 토끼 개들에게 먹일 풀을 뜯고 농사를 지었다. 왜 의자에 앉아 있고 싶지 않았겠나. 하지만 손가락이 부르트게 일하지 않으면 “꼬르륵” 소리만 들어야 했다. 최대 과제는 겨울나기였다. 공부 한번 마음껏 해보는 것. 딱 한 가지 소원이었다. 그렇지만 그저 꿈이었다. 어차피 대학도 못 갈 텐데 시간 낭비였다.
지식이 있거나 재능이 있거나 예쁘거나 돈이 많거나…. 이 중 두 가지는 가져야 한다고 사람들이 그랬다. 북한도 변했다. 자기가 벌어서 먹고사는 세상이 된 지 오래였다. 자식도 한 명, 아들보다 딸이다.
혜심이도 예쁨 받고 싶었다. 하지만 늘 손가락질을 받았다.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없었다. “반역자의 집”, 사람들은 말했다. 엄마가 중국에 자주 왔다 갔다 했다는 이유였다. 억울했다. 사회 환경이 이러니 먹고살려고 그런 건데! ‘아웃사이더로 살기 싫다, 내가 열심히 살면 내 자식은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혜심이는 바라고 또 바랐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이혜심이라는 이름을 알게 만들 거야.” “모든 사람이 나를 우러러보게 할 거야.” “나는 전설이 될 테다. 내가 보여줄게.” “내가 지금 가진 건 열정뿐이다.” 혜심이 노트에는 빈 공간이 없었다. 힘들 때마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날 해야 할 공부를 마칠 때마다 ‘승리’라는 단어가 차곡차곡 적혔다.
▼ “내 이름, 사람들이 알게 할 거야”… 새 꿈을 꾸다 ▼
학교를 다니는 탈북 청소년이 희망하는 최종 학력은 대학교가 67.0%로 가장 많다(2014 탈북 청소년 실태조사). 다음은 △대학원-박사(14.2%) △전문대(6.6%) △대학원-석사(6.1%) 순이었다. 가장 필요로 하는 지원 역시 학습과 학업 부분(69.1%)이었다. △경제(63.0%) △진로상담(28.4%) △의료(7.5%) △친구 교류 등 적응(3.0%)보다 높은 수치다. 탈북 학생 다수가 대학 진학을 원하지만 대부분 대학 문턱에 가보지도 못하거나 진학을 해도 공부하기 버거워한다. 어쩌면 혜심이도 ‘탈북 학생 학업중단율’ 수치만 높이는, 그런 학생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이해심 많은 해피 바이러스 이혜심!”
입을 열기도 전에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들킬까 봐 두려워 중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제 말해야만 한다.
“나는 북한에서 온 이혜심이야. 모르는 게 많고 부족한 게 많으니까 많이 도와줘.” 창포중과 상산고에서 처음 친구들을 만날 때 혜심이는 솔직히 말했다. 숨겨서 얻을 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말투와 억양 때문에 금방 들통 날 일이었다. 그럴 바에야 솔직히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는 게 최선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가급적 밝히지 않고 싶다는 탈북 청소년 비율은 2014년 32.3%로 2012년보다 4.2%포인트 증가했다. 같은 기간 ‘아무 거리낌 없이 밝힌다’는 응답은 2.4%포인트 줄었다(21.8%→19.4%). 북한 출신임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이유로는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44.2%) △차별대우를 받을까 봐(26.0%)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호기심을 갖는 게 싫어서(16.4%) 등이 꼽혔다.
상산고 친구들은 이상했다. ‘이 애들은 북한에 관심이 없나?’ 오히려 혜심이가 궁금했다. 중학교 때는 첫 일주일간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아이들은 “김정일 알아?” “거기도 냉장고가 있어?” “텔레비전은 있냐?” 질문을 쏟아냈다.
상산고에서는 3학년 때가 처음이었다. 한국사 시간에 선생님은 혜심이에게 “친구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을 질문받아 보라”고 했다. 남학생 2개 반까지 혜심이 앞에 100명이 모였다. “나는 사실 너 같은 사람을 만난 게 처음이야.” 친구들은 그제야 털어놨다.
1학년 1학기가 끝난 뒤 여학생 3명이 임 교감을 졸랐다. “혜심이랑 한 학기 더 살게 해주세요, 네?” 기숙사 규정상 방 배정은 추첨이었다. 하지만 임 교감은 입학 전에 미리 당사자와 부모에게 양해를 구한 학생들만 혜심이 룸메이트로 묶었다. 혹시 따돌림을 겪을까 봐서였다. 하지만 한 학기 뒤 아이들은 말했다. “혜심이랑 있으니 제가 자극받고 많이 배워요.”
상산고 학부모들에게 혜심이는 딸이었다. 청소를 이유로 1년에 두 번 있는 ‘강퇴(강제퇴소)’ 때 외에는 집에 가지 않았던 혜심이는 주말이나 명절에 친구 집으로 갔다. 맛있는 것을 먹고 전주 한옥마을 구경도 같이 했다. 학부모들은 혜심이가 3학년 때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려고 수학 학원을 다니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는 공부만 하면 된다”며 선뜻 비용을 부담해주려 했다. 이런 사연을 안 학원장은 공짜로 수업을 듣게 해줬다.
때때로 용돈을 쥐여 주는 것도, 자기 자녀가 받은 장학금을 선뜻 “혜심이에게 주세요”라고 하는 것도 학부모들이었다. 혜심이 통장에는 매달 꼬박꼬박 10만 원이 찍혔다. 누군지 잘 모르지만 법인 감사가 주는 용돈이었다. 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200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왔다. 홍 이사장이었다. 정부 지원금은 일반고 기준인 탓에 나머지 학비와 기숙사비는 매번 홍 이사장이 장학금으로 줬다.
친구들이 학업 스트레스와 집에서 떠나온 외로움에 엄마 아빠에게 전화할 때 혜심이는 선생님들을 찾았다. 혜심이 휴대전화 발신 목록에 집은 거의 없다. ‘나도 힘들고 엄마도 힘드니까….’ 서로 이 시간을 잘 견디고 있을 거라고 믿는 게 최선이었다. 선생님이 부모였고 교장, 교감, 이사장이 할아버지였다.
3학년 담임 박순식 교사는 혜심이를 보며 여러 번 눈물을 훔쳤다. 상산고는 아이들만큼 교사에게도 쉽지않은 학교다. 3학년 담임에게는 특히 그랬다. 하지만 혜심이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를 돌아봤다. ‘내색도 않고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는 뭐지?’ 스트레스로 전학을 고민하는 친구에게 “나 같은 꼴찌도 있는데 네가 무슨 걱정이니?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고 위로하는 혜심이가 대견했다. 박 교사에게 ‘해피 바이러스’ 혜심이는 스승이었고, 또 복이었다.
너무 기름져서 먹으면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던 삼겹살 돈가스 피자 치킨이 좋아졌다. 고향에 비하면 봄바람 같았던 한국의 겨울바람이 너무 차게 느껴졌다. 친구들이 북한 말 좀 써보라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할 수가 없었다. 가끔 포항에 가면 “전주 사람이냐”는 말을 들었다. 흔치 않은 탓에 출신이 드러날까 봐 개명하려던 생각도 바꿨다. ‘나를 혜심이로 알아주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좋았다. “이해심 많은 이혜심!”이라고 친구들이 불러주는 게.
그 말은 진짜였다. 의심했던 게 부끄러워질 만큼. 하나원을 나올 때 한 목사가 말했다.
“너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을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식도 아닌 날 위해 자기 주머니를 여는 사람이 있다고?’
3학년 6월 모의평가 성적표에는 ‘수학 2등급’이 적혀 있었다. 교사들이 모두 그랬다. “이건 기적”이라고.
혜심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쌤! 이제 시작이에요.” 기적은 혼자 만든 게 아니었다. 모두, 함께였다.
모두 함께, 그리고 처음 혼자
혜심이는 2015학년도 입시에서 서울대 간호학과에 지원했지만 합격증을 받지 못했다. 서울대는 탈북자를 뽑는 기회균형선발 특별전형이 정시에만 있어서 다른 학교 수시엔 응시도 하지 않은 터였다. 이 때문에 내용이 180도 다른 한국사까지 공부했는데….
친구들이 모두 가고 싶어 하는 대학에 혜심이도 가고 싶었다. 바보 같은 실수는 잊어버리고 남한에서 흔하다는 재수를 결심했다. ‘하지만 수업료와 교재비는 어떻게 하나.’ 동그라미 개수에 숨이 막혀 학원비 고지서는 구겨버렸다. 포항으로 돌아가 혼자 공부할 작정이었다.
홍 이사장은 지난해 2월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혜심이를 차에 태웠다. 도착한 곳은 경기 용인에 있는 재수기숙학원. 공부하겠다는 녀석을 위해 홍 이사장이 직접 알아본 학원이었다. 홍 이사장도 학원장도 혜심이에게 한 말은 똑같았다. “비용 생각은 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렴.”
화장실 가고 잠자고 먹는 시간 빼고 공부만 했다. 자신을 위로해 줄 친구도 선생님도 없었다. 탈북자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밥을 먹으러 갈 때도 저만치 달려가서 꾸역꾸역 넣었다. 남들보다 한 그릇씩 더 먹었는데 살은 빠졌다. 북한에서 막 왔을 때(45kg)보다 2kg이나 줄었다. 스트레스 속에서 공부만 해서 그런 듯했다.
지난해 6월 혜심이는 기숙사에서 강퇴를 당했다. 메르스 위험이 높았을 때라 밖에 한번 나가면 기숙사에 다시는 못 들어온다는 말에 끝까지 버텼다. 하지만 감기는 피로가 누적된 혜심이를 결국 쓰러뜨렸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기어이 다시 돌아왔다.
6월 모의평가 전체 등급이 수능 때보다 총 4등급 향상됐다. 국어 영어 수학 사회탐구가 모두 한 등급씩 올랐다. 혜심이는 이화여대 수시 자기소개서에 “스스로 공부하고 발전할 수 있는 사람”임을 강조했다. 수능을 보진 않았지만 재수 덕을 본 셈이다.
모든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려 인터넷으로 합격 소식을 확인하고는 정말 환하게 웃어봤다.
“진짜 시작이다, 얼마든지 덤벼”
집에 웃음꽃이 피었다. 6년 만이다. 지금까지 명절이 즐거웠던 적은 없었다. 늘 불안했다. 할머니 엄마 이모랑 콩찰떡을 먹었다. 북한에서 설에 먹는 송편 대신이었다. “참말로 한시름 놓았다”고 모두 입을 모았다.
방송 뉴스 앵커가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전했다.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찼다. 예전이었다면 혜심이는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아무렇지 않다. ‘북한이 어떻게 해도 내 잘못이 아니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제 어떤 말에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단단해졌다.
“솔직히 (북한 출신인) 여러분 선배들도 적응하기 힘들어해요. 영어가 어렵고 친구들보다 나이도 많으니까….”
오리엔테이션에서 교수의 말에 북한 출신 신입생들이 움츠러들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혜심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얼마든지 덤벼!’ 혜심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짜 시작이다. 살고 싶은 인생을 산다. 열심히 살 것이다. 7년 전 강물에 몸을 내던졌던 것보다 더욱 힘을 내서.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