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네빈슨의 ‘1차 폭격 이후의 이프르’(1916년). 이프르는 제1차 세계대전 격전지였던 벨기에의 도시다
우리나라 좌파의 이념은 반미주의, 평화주의, 통일지상주의다. 그러나 최근 김정은의 광적 행태로 체제가 붕괴할지 모른다는 기류가 형성되자 좌파들은 현 체제 유지가 중요하고 통일은 그 다음 순서라고 한발 물러섰다. 결국 그들이 바라는 통일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미세하지만 매우 중요한 지형학적 변화다. 크라잉넛의 노래도 만일 요즘 만들어졌다면 ‘하나 될 코리아’가 아니라 ‘둘이서 평화로운 코리아’가 되었을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후 정부가 개성공단을 폐쇄하자 좌파들의 평화주의 공세가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페이스북에 “정부가 국민을 이렇게 불안하게 해도 되는 것인가. 진짜 전쟁이라도 하자는 것인지,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과 국민을 안중에 두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글을 올렸다. 백낙청 씨는 현 상황이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아니라 평화를 둘러싼 상식과 비상식 간의 충돌이라며, 정부는 평화를 뒤흔드는 비상식적 행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 진보의 ‘공자님’ 격인 미국의 진보학자 놈 촘스키는 남북한의 관계가 개선되면 보수 정권이 권력을 잃게 되므로 남한의 보수 정권이 남북 평화정책을 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외부로부터의 위기를 부추겨 위기의식을 일깨우는 것이 보수에 이익이 되고 기득권 수호에 중요하다”라거나 “끊임없는 전쟁 상태, 테러와의 전쟁이 기득권에 유익하다”라는 그의 말은 우리나라 철부지 20대들도 앵무새처럼 외우는 클리셰(clich´e·상투어)여서 대석학의 말치고는 어쩐지 공허하고 진부하다.
“장구한 평화는 한갓된 상인 기질만을 왕성케 하고, 천박한 이기심과 비겁과 문약을 만연시켜, 국민의 심적 자세를 저열하게 만든다”(‘판단력 비판’)는 칸트의 지적이 그래서 더욱 가슴에 와 닿는 요즘이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