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신화’ 이윤우 삼성전자 고문의 제2 인생
이윤우 삼성전자 고문의 새로운 취미는 민화다. 곤충에 대한 관심과 새 취미가 합쳐져 그는 46개의 캔버스 위에 석고를 얹고 그 위에 채색을 해 곤충을 입체로 정교하게 표현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 고문이 들고 있는 캔버스 속 곤충은 무당벌레.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한국 반도체 신화의 견인차로 꼽히는 이윤우 삼성전자 고문(70)을 14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미소빌딩에 자리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 고문은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무언가’가 가득 든 투명한 통 3개를 테이블 앞에 놓았다. 그 안에 빼곡하게 든 것은 말린 곤충. 오른쪽 통에는 귀뚜라미, 가운데 통에는 낚시 미끼로 흔히 쓰는 ‘밀웜(갈색거저리 애벌레)’이 가득했다. 그리고 왼쪽 통은 모양은 밀웜과 같지만 크기와 굵기가 새우깡만큼 커다란 아메리카왕거저리 애벌레로 꽉 차 있었다.
처음에는 통 안에 손을 넣기도 꺼려졌다. 이 고문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마른안주를 꺼내듯 네댓 마리씩 꺼내 플라스틱 쟁반 위에 늘어놓았다. 손님을 위해 내주는 음식에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나마 가장 무난해 보이는 밀웜을 집어 들었다. 몇 차례 주저한 끝에 입에 넣었다.
현업에서 물러나니 추억에서 돌아온 ‘곤충 사랑’
“2050년이 되면 지구 인구가 약 90억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2013년 유엔은 곤충이야말로 인간의 미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이라고 지목했습니다.”
이 고문은 2012년 1월 삼성전자 부회장 자리에서 상임고문으로 물러났다. 지난해 1월부터는 삼성전자의 ‘비상임 고문’이다. 이 고문은 현재 한국식용곤충연구소 수석고문, 한국유용곤충연구소의 고문 등을 맡고 있다. 두 연구소의 고문을 맡은 지는 이제 1년 정도가 됐다.
“전 지방(대구) 출신입니다. 어린 시절 놀 곳이라곤 논밭밖에 없었는데 거기서 메뚜기, 방아깨비, 왕잠자리와 같이 놀았지요. 메뚜기는 잡아서 구워 먹고, 왕잠자리를 잡는 건 당시 또래 아이들에게 ‘트로피’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바빠지니까 자연스레 그 시절을 잊고 살게 되고, 마침내 숨을 돌릴 여유가 생기니 다시 떠오른 거죠. 곤충은 제게 예쁜 추억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먼저 찾아다니게 됐습니다. 곤충과 관련된 일을 제가 도울 수는 없을까.”
“식량을 먹였을 때 늘어나는 체중 있지요? 소나 돼지에 비했을 때 곤충이 훨씬 효율이 좋고, 사육 시 발생하는 온실가스 양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효율 면에서나 환경 면에서나 사람이 흔히 먹는 소, 돼지, 닭은 곤충을 따라올 수가 없어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할 때마다 이 고문은 본인이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일목요연한 설명을 이어갔다. 예를 들어 고품질 동물 단백질 1kg을 얻으려면 식물 단백질 6kg을 먹여야 한다. 반면, 귀뚜라미 무리의 체중 1kg을 늘리기 위해서는 사료 1.7kg이면 충분하다. 귀뚜라미에서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은 80% 정도. 이를 감안하면 사료 효율은 더 뛰어나다. 닭과 돼지는 체중의 55%, 소는 40%를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귀뚜라미나 거저리를 사육할 때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은 소나 돼지를 키울 때 발생하는 양의 100분의 1에 불과하다.
이 고문은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문제가 되는 구제역이나 조류인플루엔자(AI) 같은 전염병 문제에서도 비켜나 있다고 덧붙였다.
그가 수집한 것은 기관이나 전문가들이 내놓은 분석 자료뿐만이 아니었다. 곤충과 관련된 신문 기사도 빼놓지 않고 스크랩했다. 수개월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맛보기 힘들다는 덴마크 유명 음식점 ‘노마(Noma)’에서 현지 곤충을 식재료로 사용한다는 기사부터 프랑스 유명 요리 대학에서 곤충음식 조리를 과목으로 넣었다는 기사까지.
“우리나라는 식용곤충을 연구하는 데 이미 세계보다 몇 발 뒤처진 거예요.”
한국 반도체 1세대로서 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렸던 그에겐 국내의 식용곤충 연구가 타국에 뒤처진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국내 곤충연구소를 돕기 위해 고문을 자처한 것도 그 때문.
한국식용곤충연구소는 안전하면서도 맛있는 곤충 메뉴를 개발하고 식용곤충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 중이며, 한국유용곤충연구소는 살충제 대신 천적 곤충을 이용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한국유용곤충연구소가 만든 제품 ‘파리킬러랩터’는 파리의 천적인 배노랑금종벌의 알을 제품화한 것으로 이 벌은 파리의 번데기 속에 알을 낳아 파리가 죽도록 만든다. 곤충을 주원료로 한 동물 사료 또한 개발 중이다.
“분명 아이디어도 좋고 유용한 기술들인데 사업화가 잘 안 되고 있어 안타까웠어요. 제가 고문으로서 하는 일은 바로 연구소의 마케팅과 프로모션을 도와주는 겁니다. 제가 직접 인적 네트워크가 돼주고 사업적인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관련된 국내 규제도 엄격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도 찾고 있습니다.”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화실로 들어가니 이곳에서도 이 고문의 유별난 곤충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고문은 캔버스 위에 곤충 모양으로 석고를 얹고 그 위에 채색을 한 타일을 작업 중이었다. 아직 10여 개밖에 완성하지 못했지만 총 46개를 만들고 공간을 마련해 한쪽 벽을 곤충 그림 타일로 메우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실제 곤충의 박제를 보고 만들고 있어요. 일단은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곤충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한국 곤충 중에도 예쁜 게 많아요.”
디스플레이는 이미 따라잡혔다… 반도체 ‘초격차’ 벌려야
이 고문은 한국 반도체 신화를 이끈 1세대로 꼽힌다. 이 고문에게 현재 세계 반도체 시장의 변화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물었다.
“액정표시장치(LCD) 디스플레이 기술은 이미 중국에 따라잡혔지요. 반도체 기술 또한 안일한 태도를 고수한다면 따라잡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27년이나 뒤처져 있던 일본과 미국 반도체 기술을 추월했는데, 중국이 우리를 추월하지 못하리란 법이 없지 않습니까.”
중국 최대 LCD 디스플레이 제조사인 BOE는 지난해 12월 대규모 공장 기공식을 열며 2020년 삼성과 LG를 넘어 세계 1위가 되겠다고 공언했다. BOE가 신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초기 투자비용 400억 위안(약 7조2000억 원) 중 90%는 중국 정부가 지원하고 나선다. 또한 중국은 LCD 디스플레이에 그치지 않고 반도체 국산화를 위해 향후 10년간 1조 위안(약 180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힐 만큼 공격적이다. 한국 반도체 기업의 숙련된 엔지니어를 몇 배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해 중국으로 모셔가는 것은 덤이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는 반도체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점점 더 소극적으로 되고 있다. 정부 기술개발(R&D)만 해도 관련 예산이 점점 줄어 사업 과제를 따내기가 쉽지 않다. 2012년 1326억 원이었던 R&D 예산이 올해엔 절반에도 못 미치는 540억 원으로 확정됐다. 반도체 기술이 어느 정도 성숙 단계에 이르면서 새로운 성과를 내는 게 어려워진 만큼 연구자들이 좋은 평가를 받기도 어려워져 떠나는 연구자가 늘고 있다. 반도체 관련 학과의 교수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학과 정원도 줄어들었다. 한마디로 반도체 연구의 분위기가 침체된 것.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반도체로 1등 자리에 올라서고 지금까지 유지해 오고 있었던 비결은 반도체 산업이 가진 노동집약적인 특성 덕분이에요. 한국 반도체 기술이 빠르게 성장하던 1980, 90년대엔 한국과 일본의 고급 엔지니어 수가 100 대 3 정도까지 벌어졌어요. 여기에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고, 좋은 시기에 과감한 투자가 이어지면서 기술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겁니다. 문제는 이 길에 왕도랄 게 없어요. 누구든 같은 방법론으로 필요한 조건을 갖추면 곧 따라올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 고문은 중국이 아직까지 한국의 반도체 기술을 따라오지 못하는 원인으로 높은 ‘기술 격차’를 꼽았다. 이 기술 격차 때문에 중국은 그간 10년의 노력에도 한국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중국은 샌디스크 등 유명 반도체 기업을 사들이거나 공동 개발에 힘쓰며 추격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의 추격에 비해 우리 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입니다. 정부 주도로 투자를 늘리고 침체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분위기를 바꿔야만 점점 좁혀드는 기술 격차를 다시 벌릴 수 있습니다. 기술이라는 게 격차가 클수록 점점 더 따라잡기가 힘들어지는 만큼 넘보기 힘든 ‘초격차(超隔差)’를 만들어야 힘겹게 얻은 세계 반도체 1위라는 자리를 고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우상 동아사이언스 기자 ido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