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 서울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
국내 통증치료의 선구자로 꼽히는 이상철 서울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가 대상포진 후 신경통을 앓고 있는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이 교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이 지속되면 조기에 진료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 뼈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의 시작
석가가 ‘생(生)은 고(苦)’라고 했다지만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김 씨는 수면제를 병째 입에 털어 넣었다. 전부 다 토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진통제를 단번에 집어삼켰다. 또 토해냈다. 뛰어내릴 생각으로 아파트 베란다에 한참 서 있다가 난간을 잡은 손이 얼어붙었을 때쯤 다시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자신의 짜증을 매일 묵묵히 받아주는 아내의 옆자리로. 그렇게 9년이 흘렀다.
#2. 통증 명의의 시작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88년 12월 1일. ‘통증의학을 배워 오라’는 스승의 특명을 안고 이상철 서울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62)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통증관리센터에 도착한 날이다. 당시 국내엔 통증치료실을 갖춘 병원이 극소수였고 관련 연구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 교수는 주말마다 다른 의사를 도와 교포 진료 봉사활동을 하던 중 우연히 통증 의원을 운영하는 유대인 의사를 만났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척수자극술’ 등 최신 의술을 실제로 활용하는 곳이었다. 이 교수는 당장 일주일에 이틀은 이 병원에 출근하며 시술법을 배웠다.
#3. 3대째 이어진 환자와 의사의 인연
2007년 김 씨는 어머니의 권유로 이 교수를 찾아갔다. 다른 의사들처럼 제대로 진찰도 하지 않고 진통제만 잔뜩 처방하지 않을까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김 씨의 상태를 자세히 묻고 이곳저곳 검사해 보더니 신경차단술을 권했다. 다른 신체기능엔 별 도움을 주지 않고 통증만 유발하는 신경을 치료하자는 제안이었다.
시술을 받은 뒤 김 씨의 통증이 서서히 줄었다. 주위에서도 매일 짜증을 내곤 했던 김 씨의 표정이 온화해진 것을 알아봤다. 김 씨는 “치료 후 ‘사람 됐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며 웃었다.
#4. 끝나지 않은 숙제
하지만 모든 환자가 ‘구원’을 받은 건 아니다. 악성 췌장염에 걸린 50대 남성은 신경을 파괴하고 췌장을 떼어내도 복통이 줄지 않았고, 원인 불명의 섬유조직염 탓에 온 몸이 아팠던 30대 여성에게도 마땅한 시술 방법이 없었다. 이들이 병원에 발길을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는 기별이 들려왔다. 이 교수는 두 환자의 죽음을 자책하게 되는 마음을 잊을 수 없었다.
이 교수가 대한척추통증학회장과 세계통증학회 동북아지부장 등을 맡아 꾸준히 학회를 열고, 최근까지도 각종 통증치료법을 국내에 도입하고 있는 이유도 ‘의사가 배우는 걸 멈추면 통증과의 싸움에서 지는 환자가 늘어난다’는 지론 때문이다.
이 교수는 “환자가 고통에서 벗어나 밝게 웃을 때가 가장 기쁘다”며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을 앓고 있다면 초기에 진료를 받는 게 좋다”고 당부했다. 서울대병원 통증센터에서는 이 교수를 비롯해 교수 3명, 진료 교수 2명, 임상 강사 4명 등 다수의 전문 의료진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통증 관련 시술과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