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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기계’ 대신 ‘공부하는 선수’로…한국체육 패러다임 전환

입력 | 2016-03-01 21:30:00


3월 27일은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에 새 이정표가 세워지는 날이다. 생활체육의 국민생활체육회(국체회)와 엘리트 체육의 대한체육회가 통합해 ‘대한체육회’로 다시 태어난다. 통합체육회 설립기획단 유정형 단장은 “의견 차이는 있었지만 통합에 반대하는 종목단체나 시도단체는 없다. 통합체육회 출범 전에 17개 시·도 단체, 42개 종목 단체가 통합을 마칠 것”이라고 말했다. 통합 ‘대한체육회’의 탄생은 한국 체육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한국 스포츠 현장은 어떻게 바뀔까.

●‘운동 기계’ 대신 ‘공부하는 선수’로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겨울올림픽에서 5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며 빙상 전관왕의 신화를 쓴 미국의 에릭 하이든은 스탠퍼드대 의학박사였다.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 때 미국 대표팀 주치의를 맡기도 했던 하이든은 지금도 미국 스포츠 스타들이 가장 신뢰하는 정형외과 전문의다. 벨기에 요트 국가대표였던 자크 로게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도 의사 출신이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2학년 때 중퇴하긴 했지만 스탠퍼드대에서 수업을 듣기 위해 프로 전향을 늦췄다.

한국은 이런 인물이 나올 수 없었다. 운동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일반 학생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들은 바늘구멍 같은 성공 가능성을 바라보며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한다. 일반 학생은 선행학습과 입시전쟁에 찌들려 산다. 선수는 ‘운동 기계’, 일반 학생은 ‘공부 기계’다. 운동과 공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서있다.

체육단체 통합은 갈수록 높아만 가던 그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의 조화를 강조하는 통합체육회가 출범하면 스포츠클럽이 활성화된다. ‘공부하는 운동선수’의 시작이 바로 스포츠클럽의 활성화다. 어린 학생들이 학교 운동부에 가입하지 않고도 기량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장밋빛 꿈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전국겨울체육대회 초등부 전북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전북스포츠클럽 아이스하키팀이 중산초등학교를 꺾었다. ‘취미’로 스포츠를 즐기는 학생들이 ‘엘리트 선수’들을 이긴 것과 같다. 이 클럽 매니저는 “대학 아이스하키팀 코치 출신이 체계적으로 가르치면서 아이들 실력이 크게 늘었다. 학교 수업을 다 마친 뒤에 운동을 하니 성적도 좋다. 체력이 뒷받침 해주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스포츠클럽의 천국’ 독일의 국가대표는 어릴 때 클럽에서 운동을 시작한 선수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분리됐던 두 단체의 통합은 분리됐던 운동과 공부를 통합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운동만 해야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운동을 잘하면 누구나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기 때문이다.

통합체육회가 출범하면 이전까지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이 따로 치렀던 각종 대회도 단계별 리그 체계로 재편된다. 엘리트 선수와 아마추어 동호인들이 함께 참가하는 대회가 생기는 것이다. 개최 단체 분리로 중복됐던 예산 낭비가 줄어들어 대회도 더 알차고 많이 열릴 수 있다. 학교 운동부와 지방자치단체 및 실업팀 선수 위주였던 국가대표 인재 풀이 생활체육으로까지 넓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대회를 통해 우수한 생활체육 선수들을 발굴해 엘리트 선수로 육성하는 길도 넓어진다.

지금까지는 엘리트 선수와 생활체육 동호인은 구분이 명확하다. 동호인들이 공공체육시설을 이용하려면 엘리트 체육 단체에 비해 평균 2, 3배에서 최고 8배까지 비싼 이용료를 내야 했다. 동호인들의 대회는 ‘체육 행사’가 아니라 ‘일반 행사’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국체회 등록 동호인은 현재 480만 명이다. 하지만 비등록자까지 포함하면 1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통합체육회가 출범하면 이런 구분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1000만 생활체육 동호인들은 공공체육시설을 지금보다 훨씬 싸게 이용하는 부수적인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과거 예산 지원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었던 국체회 산하 시군구 생활체육회 등도 재정 지원과 지정 기부금을 받을 수 있다.

●‘스포츠 강국’에서 ‘스포츠 선진국’으로

한국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역대 최고인 종합 4위를 한 뒤 2000년 시드니 대회(12위)를 제외하고 올림픽에서 줄곧 10위권을 지킨 스포츠 강국이다. 2012년 런던에서는 금메달 13개로 종합 5위를 했다. 겨울올림픽에서도 1992년 알베르빌(프랑스) 대회에서 10위에 올랐고 2012년 밴쿠버에서 5위를 하는 등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국위 선양을 명분으로 엘리트 체육 육성에 치중하고 생활체육은 상대적으로 등한시했기 때문에 엘리트 체육만 비대해지는 불균형이 생겼다. 2015년 현재 생활체육에 참여하고 있는 청소년은 33.7%, 60대 이상은 17.2%에 그친다. 국제대회 성적 그 자체가 목적인 스포츠 강국에서 벗어나 스포츠의 진정한 가치를 최대한 많은 국민이 누릴 수 있는 스포츠 선진국으로서의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한 이유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체회가 이미 전국에 걸쳐 지원·육성하고 있는 K-스포츠클럽(구 종합형 스포츠클럽)은 스포츠 선진국으로 나아가려는 한국 체육의 기본 단위가 될 만한 모델이다. K-스포츠클럽에서는 프로 선수를 꿈꾸는 손자부터 건강을 챙기려는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다양한 연령의 지역 주민이 저렴한 비용으로 원하는 스포츠를 배우고 즐기게 하기 위해 구상됐다. 2013년 9곳이 시범 운영을 시작했고, 2014년 9곳, 2015년 12곳이 문을 열어 현재 전국에 30개가 있다. 앞으로 226개 시군구에 최소한 한 곳을 설치하는 게 목표다.

K-스포츠클럽은 선진국, 특히 독일 시스템을 벤치마킹했다. 독일은 국민 3분의 1 이상이 10만여 개의 스포츠클럽에서 운동을 한다. 병원보다 쉽게 클럽을 접할 수 있다 보니 약 대신 운동 처방을 내리는 의사도 많다. 국체회 관계자는 “K-스포츠클럽을 통해 미흡한 체육 영재 지원 시스템, 갈 곳 없는 은퇴 선수 등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통합체육회 출범을 계기로 K-스포츠클럽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K-스포츠클럽을 포함해 스포츠클럽의 활성화는 은퇴한 운동선수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도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대한체육회는 지난해 은퇴 선수 2010명의 직업 현황을 조사했다. 이들 가운데 2년 이상 활동했던 국가대표는 44개 종목의 128명이었다. 조사결과 국가대표 128명 중 49명(38.2%)이 직업을 구하지 못했다. 대한체육회가 2012년 은퇴 국가대표 선수들의 직업 현황을 조사했을 때의 무직 비율 17.6% 보다 크게 늘어난 수치다. 국가대표를 하고도 직업을 갖지 못하는 것은 선수 시절 운동만 했기 때문이다.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57개 종목에 선수로 등록된 학생은 10만 명에 육박한다. 반면 프로 구단과 실업팀 선수는 모두 합쳐도 1만 명이 안 된다. 운동만 해 왔기 때문에 다른 직업을 찾기도 힘들다.

그러나 국체회에 따르면 현재 30개 K-스포츠클럽에 평균 19명의 지도자가 활동하고 있는데 이 중 8명이 프로 종목을 포함한 엘리트 선수 출신이다. 국체회의 목표대로 226개 시군구에 최소 한 곳 이상의 K-스포츠클럽이 만들어진다면 은퇴한 운동선수들이 전공을 살리면서 일 할 수 있게 된다. 공공 스포츠클럽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면 지금은 열악한 지도자들의 처우도 크게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