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사망자 2000명 줄이자/음주단속 기준 0.03%로]<3>‘화’키우는 솜방망이 처벌
정 씨처럼 행정심판을 통해 구제받은 음주운전자가 최근 3년간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2일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면허취소 처분이 부당하다고 행정심판을 청구한 음주운전자는 1만8655명. 이 가운데 3467명(18.2%)의 면허취소 처분이 번복되거나 ‘110일 정지’로 감면됐다.
○ 남용되는 구제…만취 운전자의 ‘면죄부’
행정심판은 공공기관의 부당한 처분으로 권리나 이익을 침해받았을 때 국민권익위원회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제기하는 구제 절차다. 음주운전은 경찰 단속 과정에 문제가 있거나 면허취소 처분이 너무 무겁다고 판단되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운전을 못하면 당장 직장을 잃게 되는 생계형 운전자를 선처한다는 의미도 있다. 단 청구 기회는 1회로 제한된다.
구제받은 사람 중에는 정 씨처럼 생계형 운전자가 아닌 사례도 많다. 대학 강사와 대기업 직원, 자영업자, 전업 주부가 구제받은 사례가 적지
않다. 면허가 없어도 생활에 큰 지장이 없는 운전자들이다. 이에 대해 중앙행정심판위원회 관계자는 “불가피하게 운전을 한 사람과 생계형 운전자뿐
아니라 운전경력과 교통사고 전력, 음주운전 동기 등 다양한 요인을 검토해 감경 여부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음주운전 전력이 있는 운전자가 구제되기도 한다. 이들은 행정심판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대리기사가 오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이동거리가 짧았다”는 등의 사유를 댔다. 이수범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일관된 기준 없이 음주운전자를 구제하는 것은 행정심판위원들의 직권남용이나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음주운전 구제를 돕는 곳도 성업 중이다. 기자는 온라인 검색을 통해 확인된 행정사무소 세 곳에 직접 구제 가능 여부를 확인했다. “혈중 알코올 농도 0.132%로 운전하다 접촉사고를 낸 대기업 과장”이라고 소개했다. 5년 전에도 음주운전에 적발된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세 곳 모두 “전혀 문제없다. 이 정도 사고면 충분히 면허정지 110일로 감면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들은 “35만 원을 입금하면 행정심판 청구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만들어 주겠다”고 설명했다. 혈중 알코올 농도 0.156%의 만취상태였다고 상담한 곳에서는 “딱한 사정이 드러나게 서류만 잘 꾸미면 혈중 알코올 농도가 0.2%를 넘어도 구제받을 수 있다”며 오히려 기자를 안심시켰다.
음주운전 습관은 고치기 힘들다. 2010년부터 5년 동안 한국의 음주운전 재범률은 41.7%에 이른다. 특별사면, 행정심판 등을 통해 쉽게 구제받은 뒤 면허를 재취득하기 때문이다. 운전자들이 음주 단속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국과 달리 선진국의 면허 재취득 절차는 훨씬 까다롭다. 2014년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면허취소 4년 내 다시 면허를 취득한 음주운전자가 한국은 83%인 반면 미국 캘리포니아 주는 45%에 불과했다. 2년 이상 상담과 치료를 받아야 면허 재취득 자격을 부여하도록 기준을 엄격하게 만든 덕분이다. 김상옥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음주운전을 단순한 과실로 보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반드시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여긴다”며 “운전을 할 수 있다는 의료적, 심리학적 판단이 내려져야 면허를 재취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관목 교통안전공단 교수는 “음주운전이 범죄라는 인식을 심어 주려면 운전면허 재취득에 소요되는 기간을 현재보다 2∼3배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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