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데드풀’의 주인공.
최근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데드풀’에서 주인공은 관객을 힐끗 꼬나보며 조롱하듯 이런 대사를 내뱉는다. 이런 슈퍼히어로는 시쳇말로 ‘듣보잡’이다. 특수부대 출신의 주인공은 말기 암인 자신을 치료해 준다는 악당의 꾐에 빠져 의문의 실험에 참여하고, 실험 후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놀라운 세포재생능력을 갖게 되지만, 얼굴은 흉측하게 변한다. 주인공은 복면을 쓴 채 자신의 몰골을 망친 악당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펼친다.
마블코믹스의 캐릭터인 영화 속 데드풀은 기존 슈퍼히어로들과는 당혹스러울 만큼 다르다. 일단 입에 ‘걸레’를 물었다. 인도계 택시운전사에게 “홀쭉한 갈색친구”라며 인종차별적 발언을 퍼붓는 데다 “씨×” 하는 쌍욕을 입에 달고 산다. 또 적의 머리통을 댕강댕강 날리기를 무슨 사이다병 뚜껑 따듯 할 만큼 잔인무도하며, 무엇보다도 세계 평화나 정의란 대의명분이 없다.
2. 그렇다. 슈퍼이긴 하지만 히어로는 아니다. 하긴, 어려서부터 영화 속 슈퍼히어로들을 연구해온 나로선 진정한 슈퍼히어로라고 인정한 대상이 별로 없다. 팬티를 바지 밖으로 입고 다니는 변태 같은 슈퍼맨은 중력의 제한을 받지 않은 채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므로 고난과 한계를 극복하고 인류를 구원한다는 슈퍼영웅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배트맨과 스파이더맨은 또 어떤가. 이들은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다는 점이 치명적 문제다. 정의를 지킨답시고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폭력을 통해 상대를 응징하니 얼굴을 감출 수밖에 없겠지. 캡틴 아메리카는 성조기가 그려진 방패로 무장한 채 아메리카만 지키므로 활동 범위가 너무 좁고, 헐크는 제정신이 아닌, 일종의 공황장애 상태에서만 지구를 지키므로 ‘주폭(酒暴)’에 가까우며,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나 나올 법한 명품 황금밧줄을 채찍 삼아 휘두르며 상대를 동여매고 희열을 느끼는 원더우먼은 일종의 사도마조히즘 환자가 아닐까 말이다.
양영순의 상상력 넘치는 성인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누들누드’에 등장하는 ‘정의의 사도 Z.O.T.’도 진정한 슈퍼영웅이라 보기 힘들다. 그는 악당을 물리치고 인질을 구출하는 정의로운 과업을 수행하지만, 야한 장면을 보고 치솟아 오르는 세 번째 다리를 이용할 때에만 적을 퇴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지박약 혹은 호르몬 결핍으로 봐야 한다.
외려 잘생긴 얼굴을 감추지 않고 엄청난 재산을 기반으로 특수 슈트를 개발해 그것을 입고 날아다니면서 연예인인 양 스스로를 뽐내는 아이언맨이야말로 자본주의 시대의 슈퍼영웅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영혼까지 살 수 있다는 돈이야말로 ‘슈퍼’이고, 신의 영역까지 파헤치는 첨단 과학이야말로 ‘히어로’가 아닌가 말이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 시를 쓰기를 원하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나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러워서 서명을 못하겠습니다!”
적을 부숴버리는 일보다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였던 윤동주의 숙명 같은 자괴감이야말로 진짜 슈퍼파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