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가 5000원!”
지난달 26일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이 서울 최대 규모로 새로 단장하고 문을 연 날. 백화점 지하와 연결된 서울 서초구 반포동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에는 한 벌에 3000원짜리 옷을 파는 종업원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가게를 찾은 직장인 강성희 씨(36·여)는 니트 원피스와 블라우스 두 벌, 카디건 두 벌을 골랐다. 비닐봉지 한가득 담긴 옷 5벌의 가격은 2만1000원. 15년째 옷 장사를 하고 있는 종업원 박모 씨는 “손님들이 하도 싼 것만 찾다 보니 마진을 줄여서라도 싸게 파는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경기 침체가 길어지면서 ‘가격파괴’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서울시내에서도 3000원짜리 옷이나 1000원짜리 커피를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백화점과 대형마트도 연중 할인 경쟁을 벌이고 있다. 최근의 이런 모습은 한국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들어서는 전조(前兆)가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계속된 불황으로 100원이라도 더 싸게 팔려는 가격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젊은이들의 거리인 서울 홍익대 앞에는 500원으로 노래 2곡을 부를 수 있는 코인노래방도 등장했다. 1시간에 2000원만 내면 된다고 홍보하는 홍대 인근의 한 노래방 주변을 2일 오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짙어지는 디플레이션의 그림자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외식업계였다. 음식점과 커피전문점 등은 경기 침체로 좀처럼 열리지 않는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저가(低價)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5월부터 가맹사업을 시작한 생과일주스 전문점 ‘쥬씨’는 지난해에만 전국에 200개의 가맹점을 냈다. 아메리카노는 1000원에, 딸기바나나주스 등 생과일만 넣고 갈아 만든 주스는 1500원에 판다. 한 끼 식사보다 비싼 커피값 앞에서 망설이던 고객들을 타깃으로 한 전략이었다. 쥬씨 홍대점에서 일하는 서진혁 씨(22)는 “주로 용돈이 궁한 학생들이 많이 찾는다”며 “손님이 많은 날은 하루에 주스를 1000잔씩 팔기도 한다”고 말했다.
“커피 내가 쏠게.”
즐길거리에서도 가격파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대학가를 중심으로 500원에 노래 2곡, 1000원이면 노래 5곡을 부를 수 있는 ‘코인노래방’이 각광받고 있다. 노래방 기계에 직접 동전을 넣어 작동시키는 방식으로, 1시간에 1만∼2만 원을 내야 했던 기존 노래방보다 훨씬 싸다. 지난달 29일 오후 8시경 찾은 홍대 앞의 한 코인노래방에는 혼자 찾거나 서너 명이 함께 온 손님들로 가득했다. 6m²(약 1.8평) 남짓한 방 19개가 모두 들어차고도 20분 넘게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조금이라도 싼 것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다이소 등 저가숍으로 몰린다. 다이소는 지난해 1조249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2014년 매출 1조580억 원과 비교하면 20%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매장을 찾는 손님은 지난해 하루 평균 50만 명에서 올해 52만5000명으로 늘었다. 다이소 관계자는 “경제가 어렵고 소비심리가 위축되면서 오히려 저가숍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백화점도 자존심을 버리고 연중 대규모 할인행사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롯데백화점은 백화점 매장을 벗어나 경기 고양시 일산 킨텍스와 서울 세텍(SETEC)에서 모두 4차례에 걸쳐 의류와 가전제품, 완구 등의 이월상품을 80∼90% 할인 판매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예전에도 출장판매를 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여러 번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며 “저가 제품을 찾는 소비자를 공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민기 minki@donga.com·최혜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