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가 5000원!”… 폭탄세일의 그늘]
국내 소비시장의 변화가 ‘잃어버린 20년’에 돌입했던 일본의 1990년대와 상당히 닮아 있어 한국 경제가 일본식 장기 불황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지갑을 닫는 소비자들이 크게 늘고 있는 만큼 근시안적 소비 진작책보다 이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가계의 소비심리를 자극할 수 있는 전방위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경기 비관하며 지갑 닫는 소비자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저성장에 따른 고용 불안, 1200조 원을 돌파한 가계 빚, 인구 고령화, 소득 양극화 등 한국 경제의 여러 구조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고용절벽에 부닥친 청년층은 ‘실신(실업+신용불량)’ 상태에 내몰려 소비 여력이 없고, 중장년층은 급증하는 주거비, 교육비 부담에 지갑을 열 수 없게 됐다. 기대수명이 늘어난 노년층은 노후 불안으로 돈 쓸 여지가 사라졌다.
소비 여력이 충분한 소비자들조차 경기 회복에 대한 의구심에 지갑을 닫고 있다. 한국은행의 소비자동향조사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6개월 후 경제 상황을 진단한 ‘향후 경기전망’ 지수는 지난달 75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3월 이후 약 7년 만에 최저치로 주저앉았다. 이런 비관적인 경제 전망은 연금과 복지 혜택이 부족한 국내 가계의 노후 불안감을 더욱 키우고 있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평균수명은 늘어난 반면 잠재성장률은 갈수록 떨어지면서 미래 기대소득이 줄고 있다”며 “이에 맞춰 현재의 소비를 조정하는 과정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탄탄한 정보력을 갖춘 젊은 소비자들이 브랜드보다는 제품의 질을 따지는 합리적 소비에 나서면서 가격 파괴가 일반화됐다는 진단도 나온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는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16’에서 “요즘 젊은 소비자들은 필요한 기능에 필요한 가격만 지불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구절벽이 불러올 소비절벽
가격 파괴 현상은 ‘인구절벽’이 코앞에 닥치면서 훨씬 더 가속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한국의 15∼64세 생산가능인구는 올해 3704만 명으로 정점을 찍고 감소하는데, 이는 20년 전 일본과 일치하는 인구곡선이다.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일본도 커피, 옷 가격에 이어 차량, TV 가격마저 본격적으로 떨어지면서 디플레이션에 빠졌다”며 “한국도 인구절벽이 시작되면서 길거리 식당과 술집들이 문을 닫고 더 심한 가격 파괴가 일어나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소비절벽이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용구 교수는 “소비가 양극화될수록 중간 가격대 제품을 생산하던 기업들이 덤핑에 나서면서 한계기업으로 몰릴 것”이라며 “국내 기업 상당수가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일본의 전철의 밟지 않으려면 경제 구조개혁을 서둘러 경제주체들이 투자와 소비에 나서도록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근태 연구위원은 “당장 올해, 내년 성장률을 3%대로 올리는 단기 부양책이 아니라 대대적인 구조개혁과 규제 개선이 절실하다”며 “정부는 중장기 성장잠재력을 높이고 미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문했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선진국 문턱에서 수출에 제동이 걸린 한국 경제는 내수 경기를 살리는 게 중요해졌다”며 “소비 위축이 성장률 하락→기업 투자 감소→고용 감소→가계소득 감소→소비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우려가 있는 만큼 가계소득을 높일 수 있는 일자리 창출이 급선무”라고 덧붙였다.
정임수 imsoo@donga.com·박희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