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타트업 기업 육성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애어리 유 씨. 샌프란시스코=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박형준 산업부 차장
그런데 웬걸, 10명 모두 취재에 응했다. 현지에 머문 닷새 동안 오전 오후로 나눠, 심지어 저녁 시간까지 할애해 가며 기업인들을 만났다.
이집트 출생 헤이텀 엘파딜 씨는 2013년에 단신으로 실리콘밸리로 넘어왔다. 그는 인공지능(AI)을 갖춘 검색 엔진을 만드는 중이다. 월 300만 원 내외의 집세를 아끼려 친구 집에 얹혀살고 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한 기업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A 씨(여)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을 끝냈다. 하버드대에서 만난 재미교포와 결혼도 했다. 둘 모두 졸업 후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안락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자신의 출신 대학인 스탠퍼드대(실리콘밸리 내 위치)에서 경영학 박사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A 씨는 변호사를 접고 실리콘밸리로 와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그들 모두 적당히 편히 살 수 있었지만 고집스레 고생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두가 ‘웃고’ 있었다. ‘비록 돈은 없지만 나만의 비즈니스를 한다는 게 너무나 자랑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지난해 하반기(7∼12월) 기자는 삼성 SK LG 등 대기업을 출입처로 둔 재계팀에 속해 있었다. 당시 한국 대기업들은 예외 없이 ‘죽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중국의 성장이 둔화되고 전 세계가 저성장으로 접어들고 있을 때였다. 광복 이후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철강, 기계, 조선 등 중후장대 산업의 경우 성장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산업절벽’이란 말도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졸면 죽는다’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강연(2015년 11월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최고경영자 조찬 간담회)이 꼭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가난한 기업인들의 미소가 신기할 정도였다.
올해 1월부터 기자는 정보기술(IT)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두 달 남짓 여러 ‘IT맨’들을 만났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실리콘밸리의 추억이 떠올랐다. 게임기업들은 아직 매출 1조 원을 달성하지 못한 곳이 대부분이지만 지난해 잇달아 매출 신기록을 달성하며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매출액 상위 게임기업들은 ‘해외 공략’ 포부를 밝혔다.
카카오와 SK텔레콤은 대규모 인수합병(M&A)을 발표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었다. 대기업의 IT 계열사들도 주력 계열사보다 매출 규모는 떨어졌지만 “포화된 국내 시장에서 벗어나 해외에서 승부수를 던지겠다”며 열의에 차 있었다. 이들 기업이 밀집해 있는 경기 성남시 판교에서는 여의도나 광화문에서 느끼지 못하는 활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판교 기업인들은 사기를 꺾는 암적 존재로 ‘규제’를 가장 많이 언급했다. 어떤 비즈니스가 돈이 될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무슨 규제가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기업 활동과 관련해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최고’라고 여기는 것 같다”는 윤치형 대표(샌프란시스코에서 마켓플레이스 ‘비렉트’를 운영)의 평범한 말이 한국 기업 환경에선 평범하지 않은 말이 돼 있는 게 안타깝다.
박형준 산업부 차장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