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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성희]공공장소에서 젖먹일 권리

입력 | 2016-03-08 03:00:00


‘대부분이 독특한 방식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일 경우에는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있다.’(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구한말 외국인들이 찍은 사진이나 기록, 화가 신윤복의 그림을 보더라도 당시에 아이를 낳은 여성들이 젖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일이 드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미혼 여성은 그러지 않은 걸로 봐서 젖가슴을 드러낸 것은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수유(授乳)의 목적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공공장소에서의 수유는 문화적 금기 혹은 품격 떨어지는 행동으로 해석되고 있다. 지하철이나 식당 등 공개된 장소에서 젖을 먹이는 여성이 사라진 것은 문명화의 증거인가. 글쎄다. 모유 대신 우유를 먹이는 엄마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엄마들이 모유 수유의 번거로움 때문에 외출을 꺼리는 일이 있다면 여성권의 퇴보일 수도 있다. 공공장소에서 젖먹이는 여성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회문화가 형성된다면 저출산 극복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버니 샌더스 후보가 유세장에서 딸에게 젖을 먹이는 마거릿 엘 브래드퍼드에게 감사 의사를 표한 것을 계기로 공공장소에서의 모유 수유가 미국 대선의 중요한 이슈로 부상했다. 이 여성이 수유하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배고픔을 호소하는 딸에게 젖을 물린 것은 모성의 자연스러운 발로’라는 찬성 의견과 ‘교양 없는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모욕적인 메시지가 동시에 쏟아졌다. 이 해프닝을 샌더스 지지로 연결하는 ‘버니를 위한 젖가슴’이라는 캠페인이 생겨났다.

▷도널드 트럼프가 수유할 시간을 달라고 하는 여자 변호사에게 “역겹다”고 말한 것이 알려지면서 역풍을 맞고 있다. 트럼프가 맘에 들지 않는 여성을 향해 쏟아낸 막말이 한둘이 아니지만 공공장소에서의 수유를 불쾌하게 여기는 여성도 많은 걸 보면 이는 남녀의 시각차나 진보 보수 이념의 문제만은 아니다. 젊은 여성 정치인들이 아이에게 젖먹이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홍보물로 쓴다면 한국에서도 반응이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