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박문사.
한옥 호텔이 들어선다는 서울 신라호텔 자리를 83년 전 상공에서 내려다본 광경이다. 여의도에서 이륙해 남산을 넘으며 저공비행으로 굽어보는 시야에 준공된 지 8개월 된 박문사(博文寺)가 들어온다. 호국영령을 모신 장충단의 동쪽 언덕에 올라앉은 박문사는 장충단을 내려다본다. 새문안 서궐(西闕), 즉 경희궁의 정문을 떼어다가 박문사의 정문으로 삼은 모양이 마치 문지기처럼 보인다는 뜻의 기사다.
박문사는 장충단과 경희궁 정문을 발아래 두고 배치됐다. 건축 재료도 광화문의 석재를 떼어오고, 경복궁의 선원전에서 목재를 뜯어와 지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는 일본 사찰 박문사가 그의 23주기를 기해 완공되어 1932년 10월 26일 낙성식을 가졌을 때 조선총독 이하 내외빈 1000명이 모였다. 일왕이 하사한 은제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연이 단풍으로 물든 남산을 배경으로 퍼져나갔다. 6개월 뒤에는 고국을 방문한 영친왕 이은 부부가 박문사를 참배했다. 1년 뒤 이토 히로부미의 24주기에는 박문비(博文碑)가 세워졌다.
‘제삿날만 되면 서울의 각 연대로부터 군인들이 일 중대 혹은 일 대대씩 나와 수천 군사들이 쭉 둘러서서 비장하고도 엄숙한 제사를 드렸다. 유족들은 비통함을 달래며 눈물지었고. 군인들은 제사를 마치고는 받들어총을 하고 보무당당한 분열식을 거행하였다. 참 장관이었다.’(동아일보 1925년 6월 13일자)
그 같은 장충단 제사는 을사늑약 이후 왜소해지고 엉성해졌다. 가사를 고쳐 부른 아리랑타령이 나온 것이 이맘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남산 밑에 장충단을 지어놓고/받들어총만 하누나 아라리오.’
그리고 군대가 해산되었다. 그로부터 제사도 끊겼다. 장충단은 사당이 헐리고 퇴락해갔다. 1920년대 들어서는 공원이 됐고 비석은 놀이꾼들 사이에서 외롭게 자리를 지켰다.
박문사 자리에는 1967년 영빈관이 섰다. 정부의 영빈관이다가 1973년 기업의 영빈관으로 넘어갔다. 박문사는 사라졌지만 그리로 오르는 길고 가파른 돌계단은 남았다.
흥화문은 1988년 박문사의 정문을 떠나 경희궁의 정문으로 되돌아갔다. 박문사는 사라졌는데 장충단은 복원되지 않았다. 계속 공원이었고 참배객 아닌 행락객으로 붐볐다.
그 사이에 비석 하나만이 맨몸으로 비바람 맞으며 우두커니 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기 쓰인 글귀 ‘의열(義烈)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도 더불어 쇠락해간다. 안중근 의사 동상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지는데 비석의 글귀마저 풍상에 닳아버린다면 후대에 한 맺힌 역사와 유적을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