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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 톡톡]오늘도 타향 학생들 부대끼며 추억을 쌓는다

입력 | 2016-03-11 03:00:00

“밥상에서 장난치던 남녀, 부부가 되기도”




《 ‘응답하라 1994’ 속 식탁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하숙생들의 얼굴이 비칩니다. 그들의 일상과 성장 스토리에 많은 시청자가 공감했지요. 하숙은 누군가 나를 위해 해준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입니다. 따뜻한 밥과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팍팍했던 하루를 위로받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 그런 생활을 끝내고 고된 세상살이를 거친 뒤에도 하숙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숙생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내가 하숙을 하는 이유

“스무 살 자취 생활에 대한 환상이 잔뜩 있었죠. 매일 인테리어용 가구를 사들이고 친구들 불러서 집에서 파티를 열었어요. 친구들은 놀다 가면 끝이지만 전 다음 날 너무 힘들었어요.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 그릇들도 부담스럽고, 분리수거도 번거로웠죠. 점점 친구들과는 밖에서 만나고 밥도 밖에서 먹고 들어왔어요. 몸이 많이 상했어요. 안 되겠다 싶어 올해부턴 하숙을 시작했죠. 생활이 규칙적으로 바뀌고 식사도 제때 하게 되니 몸이 회복되고 있는 것 같아요.”―대학생 김모 씨(21)

“서울이 집인데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게 됐어요. 기숙사 추첨에 떨어지고 자취를 하고 싶었지만 아빠가 엄하신 편이라 하숙을 하게 됐죠. 처음엔 모든 게 낯설었어요. 사투리를 한 번에 못 알아들어서 몇 번씩 되묻곤 했죠. 어느 날 하숙집 언니들이 작은 파티를 열어 저를 환영해줬어요. 그 언니들 덕분에 점점 대구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같이 자고, 같이 먹는다는 게 유대감을 주더라고요.” ―대학생 박모 씨(20)

“집이 서울인데도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느라 작년부터 하숙을 시작했어요. 학교까지 걸어서 10분이라 통학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요. 하숙은 시험만을 위해 집중하는 사람에겐 최적의 시스템이에요. 오늘 해먹을 반찬이나 공과금 납부 같은 사소한 일엔 신경 안 써도 되니까요. 고충이 있긴 했죠. 하숙집 아주머니의 두 살배기 손자가 자주 놀러 왔거든요. 처음엔 귀여웠지만 벽 밖에서 들려오는 까르륵 웃는 소리와 울음소리 등이 신경 쓰여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었어요.” ―취업준비생 류모 씨(23)

“시어머니가 ‘니 음식 진짜 맛있다’고 칭찬해 주셔서 1995년에 하숙을 시작했어요. 하숙생들과 정 나누는 게 좋습니다. 우리 집에 한번 들어오면 3년씩은 살아요. 첫 보너스를 탄 날 선물을 사서 서울에서 대구까지 내려온 학생도 있어요. 지금도 제 생일엔 전국에 퍼져 있는 우리 집 출신 하숙생이 다들 모입니다. 부모님들도 감자, 밤, 귤 등 고향의 음식을 보내 주시지요. 방학 때 집에 돌아간 아들이 ‘엄마 밥보다 하숙집 밥이 맛있다’고 했다며 토라진 어머니도 있습니다. 진심이 아니면 사람을 대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그걸 귀신같이 압니다. 늘 꿀과 매실청을 준비해 놔요. 술 먹고 속 쓰린 학생들에게 ‘일찍 댕기라’고 잔소리하는 대신 ‘꿀물 한잔 무라’ 하지요.” ―대구 북구 조정희 씨(62)

추억을 만드는 생활


“92학번입니다. 당시 하숙비가 26만 원이었습니다. 친구 여동생의 수학 과외를 해주고 한 달에 30만 원 받았어요. 그때는 한 학기 등록금이 60만 원, 학생식당 백반이 700원, 지하철 1구간 요금이 200원 정도였습니다. 하숙집 형들과 전공 이외의 모든 것을 공유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에요. 거실에는 기타, 노래책 같은 게 늘 놓여 있었어요. 금요일만 되면 도서관 앞 공터에서 시위를 했고 이념 서적도 읽었습니다.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과 서로 학보도 부쳐주고 음악회도 가고 그랬지요. 그 여학생이 롤케이크를 사서 하숙집에도 종종 놀러 왔어요. 형들은 넙죽넙죽 케이크를 입에 넣으면서 ‘너희 언제 결혼하니’라며 짓궂게 놀렸지요. 아직도 형들을 종종 만납니다. 다들 배 둘레를 걱정하고 자기 삶과 가족에 치여 살지만 만나면 금세 그때의 기개나 분위기가 되살아나서 얼큰하게 취하곤 합니다.” ―변리사 홍모 씨(44)

“건국대 행정학과 87학번입니다. 집이 제주도라서 2년간 하숙을 했어요. 3학년 하숙 때 주인아주머니는 전라도 분이셨고, 4학년 하숙 때 아주머니는 경상도 분이셨지요. 꼭 어떤 분이 음식을 더 잘하셨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음식은 두 분 다 잘하셨어요. 친구들을 데려가도, 서귀포에서 올라온 막냇동생을 하루 재워도 싫은 내색 없이 웃으며 푸짐한 아침을 차려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하숙’이란 단어를 들으면 젊은 날의 추억과 함께 따뜻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감귤 농사를 하는 문형천 씨(49)

“25년째 여성 전용 하숙을 하고 있어요. 우리 학생들이 밥이 정갈하고 담백하다는 말을 많이 해줍니다. 그 덕에 흐트러지지 않고 식사 준비를 해요. 지금 서른다섯 살인 손자가 초등학생 때부터 온 가족이 열심히 도와서 하숙을 꾸려왔지요. 요즘 같은 어려운 시기에 우리 집 학생이 대기업에 입사하고 고시에 합격하면 대견하지요. 날이 어두워지면 남편이 직접 현관문에 불을 밝혀 놓아요. 학생들 안전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H하숙 주인 한부용 씨(79)

“21년째 하숙을 하고 있어요. 2층은 여학생, 3층은 남학생이 써요. 2002년 월드컵 즈음이었던 거 같아요. 아침에 학생들 국을 떠주다 보니 마주 앉은 여학생이랑 남학생이 장난을 치고 있었어요. 분위기가 훈훈했어요. 몇 년 전 두 명이 예쁜 과일바구니를 들고 찾아왔어요. 앳된 얼굴이 겹친다 싶었는데 둘이 글쎄 부부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 그날 아침 기억이 슬슬 나더라고요. 그 둘은 우리 하숙집에서 처음 만나서 캠퍼스 커플로 거의 8년을 사귀다 결혼했대요.” ―B하숙 주인 김왕희 씨(68)

원룸형 외국인 전용도 등장

“자취를 하면 밥을 챙겨 먹기 힘들고 하숙을 하면 독립적인 공간 확보가 어렵죠. 그 절충으로 원룸형 하숙에 들어온 지 2년 반 됐어요. 각 방에 화장실, 냉장고, 에어컨이 있어요. 밥은 1층에서 먹을 수 있고요. 원룸형 하숙은 기본적으로 평소엔 자기 공간에서 생활을 하는 구조예요. 다른 학생들은 밥 먹을 때나 간혹 마주칠 뿐이죠. 각자 시간표도 다르고 아르바이트 때문에 일과도 다르다 보니 전통적인 하숙과는 다른 이런 형태의 하숙도 나타나는 것 같아요.” ―대학생 김광현 씨(25)

“10년 전엔 유럽이나 미국 학생들이 많았어요. 요즘엔 인도 러시아 태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우리나라로 공부를 하러 와요. 토스터, 커피메이커, 전자레인지, 시리얼, 우유와 달걀을 비치해 놨어요. 저녁은 한국식으로 김치찌개나 생선구이를 먹고요. 영어는 안 써요. 한국에 공부하러 왔으니 한국어를 사용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처음 하숙비 독촉을 할 때에는 노크하기 전 문고리를 잡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참 망설였어요. 요즘엔 ‘하숙비 밀렸어요’ 하고 바로 말해요.” ―C하숙 주인 윤경자 씨(60)

“방학을 통해 ‘집구하기 A TO Z’ 같은 상담과 교육을 집중적으로 하고 있어요. 자취나 하숙이나 사실 집을 보는 기준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청년들을 위해 계약 전 단열, 방음, 방충 등을 함께 살펴주는 동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경험도 적고 예산도 충분하지 않다 보니 모를 수 있는 부분이 많거든요. 주거상담사 양성 과정도 마련해놓고 있는데 기수당 서른 명 정도가 수료해요.” ―민달팽이 유니온 주거사업국장 최지희 씨(26)

“서울대의 경우 학생 정원에 비해 기숙사 수용률은 11%밖에 되질 않아요. 나머지 89%는 자취든 하숙이든 살기 위한 방을 구해야 하는 거지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두의 하우스’라는 주거 실험에 돌입하게 됐어요. 보증금과 월세를 함께 사는 사람과 나눠서 내고 욕실, 주방 등은 함께, 방은 각자 쓰는 방식이에요. 2월 말까지 총 56명의 입주자가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았어요. 이런 실험들이 점점 실제적인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서울대 총학생회 주거복지팀장 안혜린 씨(31)


오피니언팀 종합·안나 인턴기자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