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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만난 사람]아내 죽음으로 지휘봉 놓고… 스승 죽음으로 지휘봉 들다

입력 | 2016-03-12 03:00:00

3년 만에 돌아오는 마에스트로 구자범



7일 서울 대학로 정미소극장에서 만난 지휘자 구자범은 인터뷰 2시간 동안 자신이 정리한 요점을 확인할 정도로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을 때 지휘봉을 들자고 생각했다. 이제는 때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아다지오(느리고 침착하게)로 가다 격분한 듯 갑작스럽게 프레스토(매우 빠르게)가 됐다. 그리고 평정을 되찾고 안단티노(조금 느리게). 그의 말은 매우 느렸다가, 매우 빠르게, 그리고 모데라토(절제해서)를 반복했다. 인터뷰 2시간 동안 연주회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구자범(46)은 3년 전까지 지휘자였다. 전도가 유망한 지휘자였다. 연세대 철학과를 나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그는 25세의 늦은 나이에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독일 만하임 음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만하임 음대 대학원 사상 처음으로 전 과목 최고 성적을 받고 졸업했다. 그 뒤 하겐 시립오페라극장 지휘자, 다름슈타트 국립오페라극장 차석 지휘자를 거쳤고, 하노버 국립오페라극장 수석 지휘자로 발탁됐다. 한국인으로는 정명훈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지휘자 이후 두 번째로 유럽의 정상급 오페라극장을 지휘한 것이다. ‘절대음감의 천재 지휘자’ ‘정명훈 이후 한국이 낳은 세계 정상급 지휘자’ 등의 평가를 받았다.

39세에 돌연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2년간 광주시립교향악단을 맡아 지역 최고의 악단으로 만들었다. 높은 인기 덕분에 수차례 유료 관객 매진을 기록했고, 광주 클래식 연주회 사상 처음으로 입석표가 발매되기도 했다. 교도소 등 문화 소외계층을 찾아가며 클래식 대중화에도 힘을 쏟았다. 2011년부터 경기필하모닉오케트라의 지휘봉을 잡으며 한국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놨다는 평가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2013년 6월 돌연 사표를 제출했다. 일부 단원과의 갈등 끝에 한 단원이 경기도에 구자범을 모략하는 진정을 제기한 것. 곧바로 그 단원이 진정을 취하했지만 단원들 사이에서 분란이 일어날 정도로 파장이 커졌다. 일부 단원이 그의 엄격한 연습 때문에 불만이 많았고 그에 대한 음해를 했다는 것이 뒤에 밝혀졌다. 하지만 그는 사표를 제출했고, 올해 초까지 부산에 머물며 클래식과는 담을 쌓아왔다.

구자범(오른쪽)은 20일까지 서울 LG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배우 윤석화(왼쪽)가 출연하는 연극 ‘마스터 클래스’의 피아노 반주를 맡았다. 그는 “10년 넘게 오페라 피아노 반주를 했다. 가장 즐거운 일 중의 하나다”라고 말했다. 돌꽃컴퍼니 제공

그는 10일부터 서울 LG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배우 윤석화의 연극 ‘마스터 클래스’에서 피아노 반주자로 나서고 있다. 지휘자로 무대에 돌아온 것은 아니다. 7일 만난 그는 3년의 공백을 깨고 조심스럽게 오케스트라 지휘를 다시 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무엇이 굳게 닫혔던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어떻게 지냈나.


“바닷가에서 도 닦으며 지냈다. 해운대가 보이는 작은 방에 머물며 보고 싶었던 바다를 실컷 봤다. 철학과를 처음 갔을 때 시작한 방식을 다시 해봤다. 내가 만약 남자가 아니었다면, 흑인이었다면, 인도에서 태어났다면 등 여러 전제를 다 생각해봤다. 3년 내내 다시 생각해보니 다행히도 내가 대학 때 생각한 것들이 맞고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살아온 길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고 다시 생각하게 됐다.”

―항상 검은색 옷을 입나.

“내 별명이 ‘해운대 까마귀’다. 옷장에 검은색 옷밖에 없다. 지금 입고 있는 스타일 그대로 바지 6벌, 셔츠 12벌, 재킷 3벌이 있다. 내가 디자인했다. 독일에 있을 때 오페라극장 의상담당자가 만들어줬는데 다 해져서 다시 한국에서 똑같이 만들었다.”

―검은색 옷만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일단 제일 편하다. 검은색 옷으로 결혼식도 갈 수 있고 장례식도 갈 수 있다. 아무런 고민 안 하고 살 수 있다. 처음에는 지휘봉을 잘 보이게 하려고 입었다. 독일 오페라극장에서 지휘할 때 스태프가 흑백 모니터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흰옷을 입으면 지휘봉이 잘 보이지 않아 검은색 옷만 입고 다녔다.”

―3년 전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왜 그만두었나.


“내 첫사랑이었던 전처가 2012년 말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죽었다. 전처가 죽은 날 신기하게 죽음을 다룬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란 곡을 지휘했다. 그날 따라 지휘에 사용할 연미복을 세탁소 실수로 찾지 못해 평소 입고 다녔던 검은색 옷을 입고 지휘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연주회 뒤 전처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몇 달 동안 지휘를 하지 못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나와 2013년 4월 마지막 공식무대가 된 ‘레퀴엠’을 무대에 올린 뒤 나에 대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재를 하고, 해결을 했어야 했지만 난 그냥 ‘됐어’라고만 생각했다. 당시 모든 것이 허무했다. 나에게 음악을 시작하게 해준 사람이 전처였는데 이제 세상에 없으니 더 이상 음악을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나 때문에 단원들끼리 싸우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무대에 오르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그만두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

2013년 5월 작은 연주회 도중 한 여성 단원이 연주를 멈추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는 그 단원에게 징계를 내렸다. 하지만 그동안 그를 곱지 않게 보던 일부 단원이 징계를 받은 단원을 부추겨 진정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그는 하루아침에 부도덕한 지휘자로 몰렸다. 단원들이 탄원서를 제출하고, 음악계에서도 성명을 발표하는 등 그를 옹호했지만 그는 이미 부도덕한 인물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린 뒤였다. 한번 추락한 명예는 돌아오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어 조작 등 그를 비방했던 단원들은 이후 경찰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지휘자라는 자리가 그렇게 어려운가.


“영화감독은 촬영 중에는 배우들과 싸우더라도 시사회에서 결과물을 느긋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는 내가 무대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이끌어야 한다. 가장 불쌍한 독재자다.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싸웠는데 무대에서 안 싸운 척 가짜를 보여주는 것은 힘들다. 다 드러난다.”

―3년간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나.

“내가 덕이 부족한 것에 비하면 인복이 많다. 난 빚이 많다. 매달 카드 값, 은행 이자 등을 걱정한다. 다행히 한 친구는 30년 거치 30년 상환으로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강의를 부탁하는 사람, 글을 써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 통장에 돈을 부쳐준 사람도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기적 같다.”

―왜 다시 지휘봉을 들겠다고 결심했는가.

“스위스에서 지내고 있는 지인이 초청해서 지난해 12월 말 그쪽으로 갔다. 가기 전 독일 만하임 음대 대학원에서 날 가르쳤던 클라우스 아르프 교수님에게 찾아뵙겠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없었다. 스위스에 머물다 어느 날 아르프 교수님이 죽는 꿈을 꾸었다. 바로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확인해 보니 답장이 와 있었다. 암으로 병상에 누워있고, 2∼4주밖에 살지 못한다며 연락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 길로 바로 독일로 갔다. 매일 병상으로 갔지만 어느 순간 내가 교수님이 언제 죽는지 기다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교수님에게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얘기하자 내 손을 붙잡고 힘겹게 이야기를 했다. ‘넌 내가 가르쳤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 내 앞에서 다시 지휘봉을 잡겠다고 약속해라.’ 귀국길에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신에게 아르프 교수님은 특별한 분이었나.


“교수님은 ‘네 음악이 맞다’고 하신 분이다. 난 정상적인 코스를 밟고 지휘자가 된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내 음악이 진짜라며 자신의 정신을 이어달라고 말해줬다. 교수님이 돌아가신 뒤 사모님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내 남편이 너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잘 안다. 네가 최고의 제자라는 말은 20년 전부터 했다. 내 남편의 유지를 이어달라’는 내용이었다. 진짜 음악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죽음으로 그는 지휘봉을 내려놨고, 또 하나의 죽음으로 그는 다시 지휘봉을 잡겠다고 결심했다. 본인도 두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며 잠시 침묵에 빠졌다.

―지휘 제의를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많은 국내 시향에서 제의가 왔다. 객원 지휘자는 물론 상임 지휘자 제의도 있었다. 하지만 의미 있는 작업으로 다시 지휘봉을 들고 싶었다. 그 와중에 윤석화 씨의 연극 ‘마스터 클래스’에 피아노 반주자로 나서게 됐다. 전설적인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를 다룬 연극인데 대사들이 기가 막힌다. 내가 평소 레슨을 할 때마다 했던 이야기들이 나온다. 무대에 선다는 것, 진짜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리아 칼라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내 마음이 치유됐다. 나에게 하는 충고로 들리더라. ‘힐링 캠프’ 같았다.”

―해외에서 지휘봉을 잡을 생각은 없나.


“그럴 생각이었다면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관객과 내가 즐거운 것인지 고민한다. 독일은 모든 공연과 준비가 톱니바퀴 맞물리듯 돌아간다. 내 방식은 아니다. 너무 프로페셔널해서 재미가 없다. 난 연습할 때는 아마추어처럼, 연주는 프로페셔널같이 하는 것이 좋다. 한국에서는 만들어가는 과정이 나에게 의미 있고 즐거웠다. 해외 관객보다 한국 관객과 즐기고 싶었다.”

―지휘자로 다시 서는 무대는 정해졌나.

“윤석화 씨가 얼마 전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혹시 경기 고양예고에서 개교 10주년 음악회를 5월에 한다는데 지휘를 맡아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청소년들과 음악을 같이할 수 있고, 가르침도 주고, 나도 즐거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다. 3년 만에 다시 오케스트라 지휘봉을 드는 것이다. 물론 오케스트라 구성에 부족한 점이 많다. 하지만 난 오히려 안 될 것이 뭐 있겠나 싶다. 내 진심이 통하는 즐거운 연주회가 될 것 같다.”

그는 연주회 이야기를 하자 굳었던 표정이 풀리며 한층 밝아졌다. 오랜만에 지휘봉을 잡는다는 사실이 그도 반가웠을 것이다. 3년 동안 지휘대에 서는 것을 어떻게 참았을까 하는 의아함이 들었다. 그만큼 마음의 상처가 컸을 것이라는 짐작만 될 뿐이다.

―5월 이후에도 지휘봉을 계속 들 것인가.

“몇몇 악단에서 지휘를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았지만 승낙을 한 곳도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는 의미다. 3년 전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나에게 있던 악보를 모두 지인들에게 나눠줬다. 하지만 이제 그 악보들을 다시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앞으로 단원들과 다시 갈등이 생긴다면….


“내가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래도 갈등이 있으면 이제는 갈등을 해결하고 무대에 오르고 싶다. 해결이 되지 않으면 무대에 서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는 일부 문제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면 이제는 그 사람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해서 갈등을 조정하고 조금이라도 함께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다려 준 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난 팬들에게 가짜를 보여줄 수 없어 지휘를 안 하려고 했던 것뿐이다. 진짜를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지휘를 한다. 3년간 아무것도 한 것 없는 나를 잊지 않고 기다리고 지지해준 점에 대해 정말 고맙다는 말밖에 못하겠다.”

이제 그는 팬 곁으로 돌아온다. 돌아오기까지 3년이 걸렸다. 그는 ‘복귀’가 아닌 ‘지휘봉을 다시 든다’고 말했다. 그가 떠난다고 선언한 것도 아니었고, 지휘가 싫어 떠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귀이든, 지휘봉을 다시 들든 그는 조만간 다시 지휘대에 선다, 봄바람과 함께.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