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새누리 이한구 공관위원장]
새누리당 이한구 4·13총선 공천관리위원장은 11일 출근길에 당사로 들어서자마자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엔 신경질이 가득 묻어 있었다.
기자들의 질문은 전날 이 위원장이 2차 공천 심사 결과를 발표하던 단상으로 전달된 ‘쪽지’에 관한 것이었다. 당 최고위원회는 이 위원장이 김무성 대표 경선 지역을 발표에서 빼자 “다시 포함해 발표하라”는 쪽지를 긴급히 전달했었다. 그러나 이 위원장은 최고위의 합의도 아랑곳 않겠다는 듯 이를 무시했고 공관위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다.
‘멀박’
이 위원장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사실상 ‘멀박(멀어진 친박)’에 가까웠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선 당시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겨냥해 작심한 듯 경제 운용 방향을 비판하는 61쪽 분량의 보도자료를 내놓기도 했다. 한 친박 중진 의원이 “이 위원장의 별명이 ‘제멋대로 리’ 아니냐”고 할 만큼 이 위원장은 계파를 떠나 자기 색깔이 강하다.
친박계가 그를 공관위원장으로 민 것은 역으로 그의 스타일 때문이었다. 한번 소신을 정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일 것이란 판단에서다. 한 친박 의원은 2월 말 사석에서 “김무성 대표의 입술이 오른쪽도 부르트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과로로 왼쪽 입술이 부르튼 김 대표가 이 위원장 때문에 마음고생을 할 거란 얘기였다.
이 위원장의 ‘활약’에 친박계는 쾌재를 불렀다. 공천 전쟁의 1라운드였던 공천 룰 논의를 위한 당 특별기구에서 비박계에 판정패를 당했던 터였다. 2라운드인 ‘진박(진짜 친박) 마케팅’도 TK(대구경북)에서 역풍만 불며 판을 흔들 기회를 잡지 못하던 순간에 등장한 이 위원장은 친박계에 천군만마였다.
고집
이 위원장은 박정희 정부 시절 재무부 장관을 지낸 김용환 전 의원과 동서지간이다. 손윗동서인 김 전 의원은 이 위원장을 가리켜 “나도 못 말리는 사람”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고 한다.
정치권에는 이 위원장의 고집과 관련한 일화가 있다.
2008년 12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이었던 그는 예산안 심사 마지막 날 잠적했다. 그러곤 다음 날 나타나 여야 원내대표 간 정치적 합의를 뒤엎고 예산 처리를 밀어붙였다. 당시 홍준표 원내대표는 “야당의 체면을 살려주자”며 4대강 예산 일부를 삭감하자고 했지만 거부했다. “예산에서 전리품을 내세우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정치권에서는 “기획재정부 장관직을 염두에 둔 무리수 아니냐”는 수군거림도 나왔다.
칼자루
이 위원장의 독주를 놓고 청와대와 친박계가 그의 뒤를 받쳐주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는 현기환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과 ‘극비 회동’했다는 언론 보도에 “내가 누굴 만나고가 왜 문제가 되느냐”며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아 논란을 키웠다. 되레 “대통령은 만나면 안 되느냐. 내가 영향을 받느냐 안 받느냐의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비박계는 이 위원장이 청와대와 긴밀히 조율하고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6월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비판한 데 이어 “진실한 사람만을 선택해 달라”고 호소한 뒤 이른바 ‘진박 후보’가 TK에 대거 투입됐기 때문이다. ‘현역 물갈이’에 박 대통령의 의중이 담겨 있다고 보는 이유다.
김 대표와 가까운 한 의원은 “이 위원장이 처음에 들어와 물갈이 메시지를 던지다 최근 현역 컷오프를 미루며 한발 물러선 듯 나오고 있다”며 “이것 또한 권력 핵심과 작전을 다시 짠 인상”이라고 말했다.
이 위원장이 최근 불거진 일련의 파문에서 번번이 친박계의 이해를 대변하는 듯한 행보를 하면서 비박계 내 이런 의구심은 커지는 분위기다.
이 위원장은 ‘공천 살생부’ 파문이 불거진 직후 기자회견을 자처해 김 대표를 겨냥해 “공정한 공천을 해야 하는 사람이 찌라시 딜리버리(정보지 배달원), 찌라시 작가 비슷한 식으로 의혹을 받는 걸 그대로 놔둘 수 없다”며 철저한 조사를 요청했다. 반면 윤 의원의 막말 파문에는 “친구와 술 한 잔 먹고 한 건 아닌가”라며 감싸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독주의 끝은?
이 위원장의 ‘독선적 운영’을 문제 삼아 불거진 공관위 내부의 진흙탕 싸움은 이날 공동 기자회견으로 일단 봉합됐다.
하지만 이 위원장이 김 대표의 경선 발표를 의도적으로 뒤로 미루며 양측의 관계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얘기가 나온다. 비박계에서는 이 위원장이 ‘윤상현 살리기’와 ‘공천 살생부’ 파문 당사자인 김 대표와 정두언, 김용태 의원의 공천을 흥정하려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비박계는 윤 의원의 공천 배제를 요구하고 있다.
계파 간 감정의 골도 깊어졌다. 비박계는 사석에서 이 위원장에 대해 비난에 가까운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비박계 한 의원은 지난해 2월 이 위원장(대구 수성갑)의 불출마 선언을 놓고 “(더민주당) 김부겸 전 의원에게 질 것 같으니 그런 것 아니냐. 지금 어디서 칼자루를 쥐고 휘두르려고 하느냐”고 말했다. 이 위원장이 ‘비성과자’를 거론했을 때 김 대표 측 인사는 “시민단체 의정활동 평가를 보면 ‘저성과자 1호’가 이 위원장”이라고 비꼬았다.
김 대표 측은 ‘상향식 공천이 최상의 정치개혁’이라고 한다. 반면 이 위원장을 앞세운 친박계는 ‘결국 현역 기득권 유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모두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공천 방식을 둘러싼 명분 다툼은 갈등의 표면적 이유라는 지적도 있다. 결국 4·13총선 직후 펼쳐질 차기 당권과 2017년 대권 쟁탈전을 앞두고 그 전초전으로 세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여기서 밀리면 정치생명이 위험하다는 각 계파의 위기감이 대충돌의 근본 이유라는 얘기다. 그 한복판에 이 위원장이 서 있다. 현재로선 잠재된 계파 갈등 속에 이 위원장이 공천 작업을 매끄럽게 마무리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토요판 커버스토리]여야 ‘저승사자’
홍수영 gaea@donga.com·송찬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