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기자
그래서 박 대통령의 전략은 대성공인 것이다. 박 대통령의 대구 방문이 불명확할 때 한 여권 인사는 확신에 차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은 반드시 대구에 간다. 대구에서 총선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언론이 알아서 조져 주겠지. 그게 바로 박 대통령의 노림수다.”
웬만한 비판에 꿈쩍 않는 박 대통령이지만 설마 욕먹기를 즐기기야 하겠는가. 이 인사의 궤변 아닌 궤변은 계속 이어졌다. “대구에선 국회의원 후보 경선을 해본 적이 없다. 누구든 기호 1번이면 찍어주는 거다. 아마 지금 대구에서 진박이라고 하면 ‘머라카노?’ 뭐 이런 반응일 거다. 그러니 이번엔 다르다는 걸 대통령이 언론의 비판 기사를 통해서라도 설명해줘야 한다.”
이제 투트랙 전략이다. 일단 진박 후보의 지지율을 띄워야 한다. 그래야 후보 교체의 명분이 생길 것 아닌가. 박 대통령을 대신해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가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박 대통령에게 SOS를 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희망은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의 뚝심이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는 연일 ‘저성과자’ ‘비인기자’ ‘양반집 도련님’ 등 화려한 수사를 앞세워 유권자의 ‘바꿔 심리’를 자극했다.
한편으론 자격심사로 현역을 쳐내고, 다른 한편으론 박 대통령의 등장으로 판 흔들기에 나서려는 순간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박 대통령을 정무적으로 특별히 보좌해온(대통령정무특보는 그런 자리다) 윤상현 의원의 막말 파문이다. 윤 의원이 ‘정치적 음모’라고 항변할 만하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렸으니 얼마나 황망하겠나.
박 대통령의 대구행은 이런 상황에서 감행됐다. 다시 박 대통령의 대구행을 정확히 예측한 여권 인사의 말로 돌아가 보자. “언론이 ‘선거 개입’이라고 조지면 진박 후보에 대한 관심은 다소 높아지겠지만 승부를 뒤집긴 쉽지 않을 거다. 결국 박 대통령이 대구까지 갔는데 진박 후보들이 지면 레임덕이 빨라질 수 있다는 비판 기사까지 이어져야 한다. 그쯤 되면 대구 민심도 ‘우짜노, 우리 대통령 힘들어진다는데…’라며 움직일 게다.” 그런데 정말 우짜노, ‘윤상현 파문’이 이한구의 발목만 잡은 게 아니라 대통령의 행보까지 덮어 버렸다.
요즘 여권에선 2008년 18대 총선 당시 박 대통령의 행보를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당시 친박계는 대선에서 이긴 이명박 진영에 공천 희망자 명단을 건네려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허락하지 않았다. 김무성 유승민 등 당시 친박계들은 “이러다 우리 다 죽는다”고 아우성쳤지만 박 대통령은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상당수가 낙천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유승민 찍어내기부터 대구 방문까지 일련의 행보를 보면 이 친박계 인사의 해석이 지나친 상상력만은 아닌 것 같다. 결국 박 대통령의 관심은 ‘우리’가 아닌 ‘나’인지도 모른다. 나의 정치적 미래, 나의 정치적 영향력…. 박 대통령은 여권 내홍의 출발점인 지난해 6월 25일 유승민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정치를) 자기 정치철학이나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선 안 된다.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한다.” 누구를 향한 말인지 헷갈리는 요즘이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