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인간을 폭압한 3·1운동… 자연이 인간을 겁박한 3·11대지진 상대국만의 불행이 아니라, 서로 돕고 치유할 일로 봐야 12·28 위안부 합의는 불완전… 그러나 보통관계로 가기 위한 피할 수 없었던 결정… 흔들기보다 이행이 중요하다
심규선 대기자
대통령보다도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발언이 더 관심을 끌었다. 김 대표는 이날 위안부 할머니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국가 간 협상을 했으니, 현재로서는 고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이렇게 하기 어려운 말을, 이렇게 쉽게 한 사람은 김 대표가 처음인 것 같다.
더민주의 태도도 지적해 두고 싶다. 위안부 합의에 대해 더민주는 그동안 강력하게 ‘원천무효’라고 주장해 왔다. 더민주가 다수당인 서울시의회는 합의를 무효화하고 재협상을 촉구하는 결의안까지 채택했다. 그런데도 당론과 배치되는 김 대표의 발언을 누구 하나 문제 삼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를 ‘가슴’으로 다루지 않고, 정치 공세의 호재로만 이용하고 있다는 증좌는 아닌지.
아사히신문 11일자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아직도 먼 일상’이었다. 같은 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가장 피해가 심한 후쿠시마(福島) 현 주민의 60% 이상이 ‘복구의 전망이 서 있지 않다’고 답했다.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피난 중인 주민의 38%는 예전에 살던 곳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3·11은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형이라는 게 더 큰 비극이다.
3·1절은 인간, 또는 그 인간이 숭배하는 국가의 폭압 앞에서 다른 인간군이 보여준 저항정신의 숭고함을 기리는 날이다. 3·11은 비록 자연에는 선악이 없다지만 자연이 인간을 겁박하고, 인간은 이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날이다. 3·1절은 일본이 가해국이며, 3·11은 바로 옆 나라에서 일어난 불행이다. 그러나 일본은 3·1절의 의미는 망각한 채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 것인지에만 신경을 쓴다. 한국은 ‘힘내라, 일본’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범국민적 모금운동까지 벌였던 사실을 불과 5년 만에 잊어버렸다.
냉엄한 국제 역학 속에서 두 나라는 어떤 관계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는 양국 관계를 급격히 바꾸어 놓았다. 중국에 대한 시각 교정도 있었다. 그나마 위안부 합의를 안 했다면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는 전화로 북핵 문제를 협의할 수 있었을까.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사람과 단체가 분명히 존재한다. 합의 이행과 재단 설립 과정에서 분란도 예상된다. 정부는 이들을 끈기 있게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위안부 합의는 이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양국 관리들의 심리적 족쇄가 풀리고 있다. 일본인의 한국 방문도 늘어날 조짐이 보인다. 학계는 더 빠르다. 요즘 한일 관련 토론회나 세미나에서는 ‘위안부 합의 이후’라든가 ‘미래 50년’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3·1 독립운동과 3·11 동일본 대지진. 결국은 극복하고 치유해야 할 불행이다. 변화의 길목에서 만난 최대의 복병이 위안부 문제였다. 기자도 12·28합의에 일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합의의 본질을 부정할 만큼은 아니라고 보기에 합의를 파기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한다. 지나온 길은 너무 멀고, 되돌아간들 더 나은 소득을 얻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위안부 합의는 종종 상처를 입겠지만 한일이 ‘보통 관계’로 가는 데 꼭 필요한 결단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심규선대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