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평론가
세조는, “처음에 세자궁 앞에 미나리(芹)를 심은 것이 심히 아름다워서 바치게 하였는데 나중에 보니 엉망이었다”고 질책한다. 승정원에서 실무자는 중벌에 처하고, 관리책임자인 사옹, 침장고 제조까지 책임을 물었다. 내용 중에, 질 나쁜 미나리를 바치는 것은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미나리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 채소다.
요즘 드라마에 반촌(泮村)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성균관 주변에서, 학생들의 살림살이를 돌보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성균관은 작은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균관의 주요 건물은 공자를 모신 사당, 대성전(大成殿)이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조선을 지탱하는 소중한 이들이었다. 성균관은 물(반수·泮水)로 둘러싼 궁전, ‘반궁(泮宮)’이다. 중국의 태학을 본뜬 것이다. 성균관 주변의 연못에는 반드시 미나리를 심었다. 미나리는 충성과 겸양의 상징이다. 성균관을 미나리 궁전, ‘근궁(芹宮)’이라고도 불렀다.
고려 말의 문신 가정 이곡(1298∼1351)은 “미나리와 마름풀이 반수에 넘친다”고 노래했고 아들 목은 이색(1328∼1396) 역시 ‘목은시고’에서 ‘미나리 먹고 햇볕 쬐던 늙은 시골 농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도 미나리는 배추보다 더 흔하게 사용한 채소였다.
이웃 일본도 마찬가지. 세종 29년(1447년) 6월, 일본 이키(一岐)의 사신이 조선을 찾는데 그의 문서에도 미나리가 나온다. 미나리는 한중일 모두 흔하게 사용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미나리가 성균관의 ‘아이콘’이었다. ‘미나리를 캔다(채근·采芹)’는 표현은 성균관에서 공부한다는 뜻이다. 순조 26년(1826년) 1월의 기록에는 ‘근당(芹堂)’ ‘반궁(泮宮)’ ‘반장(泮長)’이 등장한다. 근당은 명륜당을, 반장은 성균관의 책임자인 대사성(大司成)을 뜻한다. 임금에게 올린 정책집을 ‘헌근록(獻芹錄)’이라 부르기도 했다(‘미암집’).
미나리는 흔하지만 귀하게 사용했다. 제사에도 미나리김치(근저·芹菹)를 사용했고 종묘에 올리는 음식에도 미나리가 있다. 정조 10년(1786년) 5월, 의빈 성씨 소생의 문효세자가 다섯 살에 죽었다. 제사 음식에 김치와 익힌 나물(숙채·熟菜)과 더불어 미나리생나물(수근생채·水芹生菜)이 있다. 중국 측 기록에는 당나라의 명재상 위징(魏徵·580∼643)이 ‘미나리초무침’을 좋아해서 한꺼번에 세 접시를 먹었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복엇국을 먹을 때 반드시 미나리를 곁들였다.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은 ‘사가집’에서 ‘아침에 푸른 골짜기의 향기로운 미나리를 캐다가 국을 끓인다’고 했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