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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붓과 삭도… 한반도 문자문명 시대를 알리다

입력 | 2016-03-16 03:00:00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4회> 다호리 발굴한 이건무 도광문화포럼 대표




11일 경남 창원시 다호리 유적을 찾은 이건무 도광문화포럼 대표(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그는 28년 전인 1988년 다호리 1호 고분을 직접 발굴했다. 창원=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이 연구관, 창원 다호리 유적에 도굴이 심하다는데 직접 가서 조사해 보시오.”

1988년 1월 정양모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이건무 학예연구관(전 국립중앙박물관장·현 도광문화포럼 대표)에게 현장조사를 지시했다. 경남 창원시 다호리 고분군은 도굴꾼들 사이에서 ‘실습장’으로 통할 정도로 유물 도난이 빈번했다. 1980년대 국가 사적 발굴을 주도한 박물관이 묵과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건무는 이영훈(현 국립중앙박물관장), 윤광진(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 신대곤(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학예연구사와 함께 다호리로 향했다.

현장은 처참했다. 야트막한 구릉 곳곳에 원삼국시대 고분을 파헤친 도굴갱 40∼50개가 줄지어 있었다. 생각보다 극심한 도굴 피해에 이건무는 다급해졌다. 한겨울 대기에 노출된 유구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급격한 손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팀원들과 하루 내내 전체 고분에 대한 현황 파악을 마친 뒤 이 중 구덩이가 제법 큰 1호분 발굴에 그달 21일 착수했다. ‘뭔가 있어 보인다’는 그의 직감은 곧 ‘월척’으로 이어졌다.

도굴꾼이 깔아놓은 볏단을 치우자 약 2m 깊이의 도굴갱 아래로 너비 0.8m, 길이 2.4m의 통나무 목관 상판이 드러나 있었다. 목관 내 유물을 빼내기 위해 도굴꾼들이 상판 일부를 깨뜨려 놓았지만 거의 원형에 가까운 상태였다. 발굴팀은 목관을 빨리 수습하기로 하고 주변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구덩이 안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와 진흙탕이 돼 바가지로 물을 퍼내야 했다. 겨울에 물을 퍼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이것은 축복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어어, 목관 밑에 뭔가 있다!”

목관에 체인을 감아 도르래로 들어올리자 바닥에 박혀 있던 동경(銅鏡) 조각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발굴팀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기 대나무 바구니가 박힌 조그마한 구덩이가 있었다. 부장품을 따로 묻은 구덩이 ‘요갱(腰坑)’이었다. 요갱 안에는 △철검, 꺾창, 쇠도끼, 낫 등 철기와 △칼집, 활, 화살, 두(豆), 부채, 붓 등 칠기(漆器) △동검, 동경 등 청동기 등이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원삼국시대 변한의 목관과 칠기가 부식되지 않고 2000년 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물 덕분이었다. 매장 직후 물이 뒤섞인 진흙이 목관을 덮어 외부 공기를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남 창원시 다호리의 진흙 구덩이에 묻혀 있던 통나무 목관(맨위 사진). 목관을 도르래로 꺼내(두 번째) 연구실에서 세척을 마친 뒤(세 번째) 보존 처리에 들어갔다. 목관 밑 구덩이에서는 2000년 전 붓(네 번째)이 발견됐다. 이건무 대표 제공

이건무가 꼽는 다호리 유적 최고의 유물은 뭘까. 그는 주저 없이 붓과 삭도(削刀·목간에 잘못 쓴 글씨를 깎아내는 지우개)를 들었다. 완형으로 처음 출토된 통나무형 목관도 학술적 의미가 상당하지만, 부장된 붓과 삭도의 상징성이 매우 크다는 얘기다. 고고학계는 다호리 유적의 붓과 삭도를 기원전 1세기경 한반도에서 문자가 쓰였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본다. 이건무의 회고. “당시 한 일본학자가 옻칠용 붓이라며 의미를 깎아내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쪽 자료를 검토해 보니 다호리와 마찬가지로 붓과 삭도, 천평(天枰·저울)이 한 세트로 출토된 사실이 확인됐어요. 마치 지금의 영수증처럼 천평으로 물건을 단 뒤 매매 기록을 죽간(竹簡)에 붓으로 기록한 흔적인 겁니다.”

이와 관련해 다호리 1호분에서는 무덤 주인의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대표적 위세품인 한나라 오수전(五銖錢)이 함께 나왔다. 기원전 1세기 변한의 풍부한 철기를 매개로 중국, 왜와 교역을 벌여 부를 쌓은 이 지역 수장이 묻혔을 것이라는 가설이 제시됐다.

28년 만에 다호리 발굴현장을 다시 찾은 그에게 혹여 아쉬움으로 남는 게 있는지 물었다. 그는 푯말 하나 없이 잡초만 무성한 1호분 자리를 한참 바라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시 겨울인 데다 추가 도굴이 걱정돼 서두른 감이 있어요. 경찰에 유구 보호를 요청하고 날이 풀리기를 기다려서 발굴에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땐 발굴팀원들이 돌아가면서 밤에 고분 주변을 순찰할 정도로 도굴 우려가 컸어요. 지금이라면 가설 덧집을 세우고 실측도 꼼꼼히 하면서 진행했을 겁니다. 그리고 발굴종합보고서를 2012년에야 뒤늦게 발간한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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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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