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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의 짧은 소설]나의 폭풍 다이어트 돌입기

입력 | 2016-03-16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이기호 소설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사랑스러운 동생 슬기에게.

이렇게 가끔 늦은 시간까지 혼자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가족 생각이 많이 납니다. 될 수 있는 한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사실 가족 생각을 하면 허기가 더 많이 지거든요. 그러면 또 잠들기도 어렵고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지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무슨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이 이어지다 보면 당장에라도 짐을 싸서 다시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버스 한 번 타면 삼십 분 만에 도착하는 나의 집, 아늑한 침대가 있고, 손때 묻은 피아노가 있고, 또 냉장고 한편 냉동 삼겹살과 군만두와 콜라와 조각 피자가 소박한 모습으로 쌓여 있는 집.

사실 좀 전, 침대에 눕기 전 마지막으로 체중계에 한 번 올라갔다가 많이 시무룩해졌습니다. 아마 제가 지금 이렇게 센티멘털해진 이유도 그 때문이겠죠. 저녁도 고구마로 때우고, 스쿼트와 윗몸일으키기도 땀 날 때까지 했는데, 그랬는데도 몸무게는 92kg입니다. 그러니까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집까지 나와 혼자 자취를 시작한 지도 60일이 지났는데, 몸무게는 겨우 0.5kg 줄어든 겁니다. 이 페이스대로라면 제가 목표로 삼은 75kg까지는 5년 하고도 8개월이 더 걸린다는 계산이 나오네요. 후…. 곰도 마늘을 100일만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데, 왜 나는 고구마를 5년 8개월 동안이나 먹어야 하는 것일까, 고구마 먹는 게 무슨 주택청약 붓는 것도 아니고…. 이참에 저녁을 고구마에서 마늘로 바꿔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우울해진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제가 단순하게 몸매 때문에, 연애라도 한 번 해볼 마음으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고 생각하고 계시겠지만…. 사실, 제 나름대로 상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제가 장남으로 태어나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유아교육과를 졸업하고 유치원에 취직한 데에는 다 그만한 신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신념이라는 말이 좀 거창하다면, 그냥 적성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90kg이 넘었지만, 몸무게와 상관없이 아이들을 돌보는 게 좋았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했습니다(물론 그건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태어난 우리 막내 슬기 탓도 있었죠). 그래서 남들이 뭐라 하든 유아교육과를 선택했고, 이렇게 바라던 대로 임용고시를 거쳐 유치원 교사가 되었습니다. 조금 뚱뚱하다는 것이, 남자라는 것이, 내 꿈을 향해 나아가는 데 전혀 방해되지 않았습니다. 유치원엔 정말 남자 교사로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거든요. 힘을 쓸 일도 많고, 에너지도 많이 필요하고…. 그래서 어쩌면 더 보람 같은 것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게 다 아이들 때문에 생긴 상처입니다. 아이들이, 그러니까 제가 달래주려고 안아준 아이들이, 제 가슴을 손으로 계속 조물락 만지는 거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뭐, 아이들이 엄마 생각도 나고,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자기 앞으로 나온 간식이 사라졌을 때, 같은 반 친구 생일잔치에 나온 바나나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졌을 때, 그때마다 모두 짠 것처럼 저를 바라보던 그 눈길을, 방귀 냄새가 날 때마다 저를 돌아다보던 그 순진한 산새반 아이들의 눈길을, 신념이나 적성만으로 이겨내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아기 돼지 삼형제 책을 읽어주면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 눈길 때문에,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저 자신이 한심스럽고 창피했습니다. 진짜 신념이 있다면 살부터 빼자, 자꾸 아이들이 미워지기 전에 다이어트를 하자, 그렇게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 어머니. 자꾸 제 자취방에 찾아오셔서 얼굴이 핼쑥해졌다, 핏기가 하나 없다, 고구마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 안 찐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마음이 약해져서 한 개 먹으려고 했던 고구마를 세 개 네 개씩 먹게 됩니다. 아이들도 이미 겉모습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 내리는 세상입니다. 제 신념과 적성을 위해서 저를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론 해남고구마 말고요, 그냥 평범한 고구마를 보내주세요. 이러다간 정말 해남고구마, 제가 다 먹어버리고 말 거 같습니다. 밤은 이미 깊었지만, 허기가 져 잠이 오지 않네요. 아버지 어머니의 건강을 기원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아들 올림.

이기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