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환 수술을 감행했던 영화 ‘대니쉬 걸’의 주인공 베게너. 그의 무모한 의지와 고집은 알파고가 갖지 못한 인간의 고유한 매력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네 살짜리 남동생과 함께 살며 부산 해운대에서 허드렛일로 연명하던 황정민은 어느 날 배고프다며 보채는 동생을 위해 어묵 1개를 훔쳤다가 억울하게도 19년 형을 선고받는다(‘레미제라블’). 7번 감방에 수감된 황정민은 감방에서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갇혀 있는 ‘해결사’ 오달수를 만나 친구가 되는데(‘7번방의 선물’), 오달수의 소개로 황정민은 소탈하고 정의로운 변호사 송강호(‘변호인’)를 만난다. 송강호의 불타는 변론으로 황정민은 15년 만에 풀려나지만, 동생은 행방불명된 지 오래. 황정민은 오달수와 함께 부산 국제시장에서 ‘꽃분이네’라는 상점을 차리면서 장사의 베테랑이 된다(‘국제시장’).’
꽃분이네가 연간 10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면서 ‘KP그룹’(‘꽃분이네’의 이니셜)으로 발돋움하자, 재벌 3세 유아인이 이끄는 악덕 대기업이 KP그룹을 인수합병하려 황정민을 협박한다. 뜻대로 되지 않자 “네 참, 어이가 없네”라며 황정민을 구타한 유아인은 ‘하와이 피스톨’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북한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 하정우를 중국에서 고용해 암살을 의뢰한다(‘베테랑’+‘암살’+‘황해’). 오달수는 피스톨 박이 쏜 총알을 황정민 대신 맞고 안타깝게 숨지고, 이에 격분한 황정민은 실미도에서 지옥훈련을 받은 뒤 살인기계로 거듭나 복수의 칼날을 간다(‘실미도’).
어떤가. 그럴듯하지 않은가. 알파고의 한 수 한 수는 이렇듯 성공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매력이 빵점인 것이다. 혹시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1패를 할 때 보였던 ‘버그’ 비슷한 현상이 시나리오 작성 인공지능에서도 벌어진다면 잘 나가던 이야기는 ‘친형을 죽이려 했다는 죄책감에 사무친 동생이 돌연 정신이상을 일으켜 얼굴에 점 하나 찍고 완전히 다른 인격이 되어 버린다’는 후진 끝맺음을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지켜보면서 인공지능이 따라올 수 없는 인간의 매력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인간은 ‘버그적’이기 때문에 매력적이란 사실을 말이다.
이세돌은 알파고와 달리 순수하다. 장고(長考) 없이 알파고와의 대국을 수락한 이세돌의 경솔함에 가까운 순수함이야말로 ‘버그적’이다. 1패할 가능성, 2패할 가능성, 전패할 가능성, 질 경우 슬럼프에 빠질 가능성, 지게 될 경우의 수에 따라 향후 입게 될 이미지적, 금전적 손해 예상치, 이번 대국에서 ‘딥마인드’가 거두게 될 마케팅 효과를 수치로 모두 환산한 뒤 “내게 247억5346만 원을 주면 기꺼이 응하겠다”고 나왔어야 ‘알파고적’인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4억 원씩 은행 빚을 내 강남 아파트를 구입한 뒤 집값 떨어질까 봐 좌불안석하는 것이 인간이다. 대전에 사는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왕복 4시간 차를 몰아 매일 열애하다 어느 날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것이 인간이다. 영화 ‘대니쉬 걸’의 남자주인공 베게너(에디 레드메인)처럼 불현듯 자신 안에 ‘여성’의 정체성이 있음을 깨달은 뒤 숨질 확률이 높은 성전환 수술을 위해 수술대 위에 용감하게 눕는 것이 인간이다. 확률을 넘어서는 무모한 의지와 고집과 경솔함과 부끄러움이 모두 인간만의 매력인 것이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