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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 앓고 있지만… “일본의 위안부 사과 꼭 받겠다”

입력 | 2016-03-21 03:00:00

정부, 위안부 치유 적극 나서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기정 할머니는 “매일 전화하고 한 달에 두어 번 찾아오는 손녀도 고맙고, 매일 와서 밥을 챙겨주고 목욕도 시켜주는 요양보호사도 고맙고, 수시로 찾아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공무원들도 고맙다”고 말했다. 당진=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라면 먹고 가. 커피도 마시고, 사과도 먹고 더 오래 이야기 하다가 가.”

16일 충남 당진에서 만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기정 할머니(91)는 이렇게 말하며 낯선 이의 방문에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요양보호사가 방문해 말동무가 돼 주지만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 적적하다고 했다.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맙다”며 기자의 손을 덥석 잡은 할머니의 손은 주름이 가득했지만 도톰하고 따뜻했다.



○ “그때 일 생각하면 너무 힘들어”

할머니가 혼자 사는 집은 작지만 깨끗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남편이 남긴 유산이다. 마음이 따뜻했던 남편은 할머니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아들을 입양해 키우기도 했다. 그 아들이 남긴 딸이 현재 할머니의 유일한 가족이자 보호자다. 몇 해 전부터 중풍으로 오른쪽 팔과 다리를 쓰는 게 불편해지자 ‘나눔의 집’이나 손녀가 “함께 살자”고 했지만 할머니는 “난 여기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몸이 쇠약해져 가는 게 문제다. 할머니는 현재 혼자 걷는 게 불가능하다. 화장실에도 엉금엉금 기어서 가야 한다. 마음의 상처는 여전하다. 열다섯 살에 영문도 모른 채 싱가포르로 끌려간 할머니는 하루 수십 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할머니는 “그때 일만 생각하면 너무 창피하고 힘들다”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렇게 옛 기억이 떠오르는 날엔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우울하고 괴롭다고 했다. 현재 치매 초기 단계인 할머니는 지난해 말 있었던 한일 간 위안부 합의에 대해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일본이 잘못한 만큼 꼭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힘줘 말했다.

○ 27명(62.8%) 치매,19명( 44.2%) 와병

현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중 생존자는 44명(국내 40명, 국외 4명)이고, 평균 연령은 89.4세다. 고령인 만큼 대부분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 지난해 10월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62.8%(27명)는 치매 진단을 받았고 44.2%(19명)는 질병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당시 국내 생존자 43명 기준). 또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할머니들은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3월 14일자 A23면 참고).

전문가들은 이들에 대한 의료와 복지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황정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연세와 건강 상태를 봤을 때 할머니들 대부분이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단계”라며 “특히 혼자 지내는 분들을 제대로 돌봐 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정부는 2016년 기준 1인당 월평균 105만5000원의 간병비를 지원하는데 이를 더 늘리는 것은 물론이고 정신과 상담 등 더 전문화된 의료 서비스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 한일 합의 의미 정확히 알려야

무엇보다 지난해 말 있었던 한일 간 위안부 합의가 할머니들에게 더 큰 상처가 되지 않도록 정부가 나서서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합의의 본질은 일본 정부가 ‘일본군이 관여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다는 데 있는데도, 이 같은 본질이 할머니와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의 고위 책임자들이 나서 할머니들과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이해를 구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교식 이주배경청소년지원재단 이사장은 “후손들이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도록 정부 차원에서 위안부 관련 사업을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며 “무엇보다 할머니들이 오랜 세월 응어리진 가슴속 아픔을 풀고 국민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여생을 살 수 있도록 정부와 국민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진=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