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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해의 역사속 한식]물밥(水飯)

입력 | 2016-03-22 03:00:00


황광해 음식평론가

효종 5년(1654년) 2월 10일, 정언 이상진이 영의정 정태화와 병조판서 원두표를 탄핵한다. 병조판서가 술상과 기생, 음악을 준비하여 상급자인 영의정의 집에서 한바탕 놀았다는 것이다. 상소문 중에 세종대왕 당시 영의정 황희와 호조판서 김종서의 ‘물에 만 밥’, 수반(水飯) 접대가 등장한다. 김종서가 황희에게 물에 만 밥을 준비하여 접대(?)하려 했더니, 황희가 김종서를 뜰아래 세워놓고 “아첨하려 한다”고 꾸짖었다는 내용이다.

‘수반’은 밥상 차리기 귀찮을 때, 밥 먹기 번거로울 때 후루룩 먹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물밥’은 정식식사는 아니다. 간편식이다. 간단한 음식이지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수반은 때로는 정치적인 음식이다. 성종 1년(1470년) 5월 29일 ‘조선왕조실록’에 수반이 나타난다. 성종이 “가뭄이 심하니 낮수라를 수반으로만 올리라”고 명한 내용이다. 조선왕조 때에는 가뭄 홍수 등 천재지변이 있을 경우 국왕이 음식을 줄였다. 이틀 후인 6월 1일 원로대신들이 수반을 멈출 것을 청한다. 내용이 상당히 길다. “근래 가뭄으로 인하여 감선(減膳)한 지가 오래되었다. 낮에 또 수반을 올리게 하시니 예전에도 이렇게 한 적은 없었다.” 성종이 답한다. “세종대왕 때에는 풍년이라도 수반을 올리게 했다. 지금 수반을 먹는 게 무슨 잘못이겠는가?” 노(老)대신들도 지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비위(脾胃)는 찬 것을 싫어하므로, 수반이 비위를 상할까 염려된다. 보통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지존(至尊)이겠습니까?” 성종이 까칠하게 응답한다. “경(卿)의 말과 같다면 늘 건식(乾食·마른 음식)을 올려야 하겠는가?”

한 달 남짓 후인 7월 8일에도 또 수반을 두고 논쟁이 벌어진다. 노대신과 승지가 “요즘 비가 흡족해서 곡식이 잘 익으니 식사를 제대로 하셔야 한다”고 아뢴다. 재미있는 것은 성종의 태도다. 끝까지 수반을 고집한다. “감선하는 것은 가뭄 때문이 아니다. 낮에 수반을 먹는 것은 더운 날씨 때문이다.”

성종은 열세 살에 왕위에 올랐다. 예상치 못했던 왕위계승이었다. 왕은 어렸고 대신들은 노회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공이 큰 대신들도 많았다. 노대신들이 국가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왕은 원상회의의 결과를 확인하는 역할만 맡았다. 성종의 즉위를 주도한 이들도 바로 원상들이었다. 게다가 수렴청정 체제였다. 어린 왕은 스트레스가 심했다. 입맛이 없으면 늘 수반을 찾았다. 성종의 수반은 정치적인 투정, 저항일 수도 있다. 한의사들은 성종이 스트레스가 심해서 몸속에 열이 많았고 따라서 수반, 물에 만 밥을 찾았다고 말한다.

광해군 역시 울화병으로 수반을 먹었던 경우다. 인조는 반정으로 실각한 광해군을 강화도로 보냈다. 인조 6년(1628년) 2월, 광해군에 대한 근황이다. “삼시 끼니에 물에 만 밥을 한두 숟가락 뜨는 데 불과할 뿐이고 기력이 쇠진하여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지경이다.” 물에 만 밥은 속이 타는 사람들이 먹었던 것이다.

인조 역시 몸이 아플 때 수반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 9년(1631년) 1월의 ‘승정원일기’에는 인조가 인후염 등으로 고생하는 내용이 자주 나타난다. 30일에는 신하들의 낮 문안을 받고 “(몸 상태가) 아침과 같다. 수반을 조금 먹었다”고 말한다.

정조에게 수반은 효도의 상징이다. 수원 화성 언저리(지금의 화성시)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모셨던 정조는 묘에 다녀오던 날 시를 남겼다. ‘비석 뒤에서 수반을 먹고 더디 더디 출발한다’고. 아버지를 떠나기 아쉬워하는 아들의 효성이 엿보인다.

수반은 곤궁함의 상징이기도 했다. 조선 중기 문신 성이성은 1645년, 청나라 사행(使行)에 서장관으로 참석한다.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길, 사신단은 퍽 힘들었다. ‘새벽 5시에 길을 떠난다. 강가 벌판에서 아침을 먹었다. 병이 있어 며칠째 식사를 못하는 이들이 많다. 조기를 몇 마리 사서 수반을 차린다’는 내용이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