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발매된 길버트 캐플런 지휘의 말러 교향곡 2번 음반(도이체그라모폰 레이블) 표지. 동아일보DB.
조성하 전문기자
뒤늦게 그를 추모하는 이유. 그가 보여준 ‘이중생활’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답인 듯해서다. 이중생활이란 텔레그래프의 추도 기사에 잘 드러나 있다. ‘말러 연구의 저명한 학자로 변신한 월가의 백만장자 출신 아마추어 지휘자’라는. ‘저명한 학자’ ‘백만장자’ ‘아마추어 지휘자’라는 수식어는 모두 한 사람을 수식한다. 캐플런은 명문 듀크대를 졸업한 후 월가로 진출한다. 1967년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트’라는 투자 잡지를 창간하고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1984년 이 잡지를 7500만 달러에 팔아 백만장자 반열에 들었다.
그런 그가 지휘자로서 돈도 받지 않고 오로지 한 곡만 지휘하며 말러 전문학자로 추앙받게 된 연유. 24세 때인 1965년 뉴욕에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한 아메리칸심포니의 말러 교향곡 2번 연주를 들은 게 계기다. 그날의 느낌을 그는 생전 AP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번개를 맞은 듯했다. 그래서 연주회장을 나설 때 나는 들어설 때의 내가 아니었다.” 5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스케일이 엄청나다. 100명도 넘는 오케스트라에 합창단과 솔로까지 필요하고 연주도 한 시간 반이나 걸린다. 작품엔 ‘부활’이란 부제가 붙었는데, 이 곡엔 인간의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이 두루 담겨 있다.
그날 말러 2번 교향곡은 캐플런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그리고 거기 심취된 그는 그 곡의 심연까지 내려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관련된 것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16년. 그러는 동안 지휘를 생각하게 됐다. 그래야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것 같아서. 1981년 그는 줄리아드 음악원을 갓 졸업한 학생을 사사하며 그 꿈에 도전했다. 그때가 마흔. 지휘자로는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꿈은 이듬해 현실이 됐다. 링컨센터 공연장을 가득 메운 2800명의 초대 손님 앞에서 지휘한 것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평은 예상 밖으로 좋았다. 그래서 지휘는 계속됐다. 런던심포니, 빈 필 등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이 그를 초청했다. 도이체 그라모폰 레이블과는 두 차례 녹음했고 음반도 꽤 팔렸다. 말러 2번 교향곡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에 올랐다. 하지만 지휘자가 될 결심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감당해야 할 위험이 너무 커서였다. 하나는 지휘자가 되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휘자를 포기한 뒤 틀림없이 하게 될 후회. 그는 첫 번째 위험을 선택했다.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평생 후회하며 사는 위험은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은퇴 즈음의 중년이라면 누구나 이런 꿈을 꾼다. 은퇴하면 그간 못했던 여행을 실컷 하겠다는. 하지만 실제는 언감생심이다. 가장 큰 이유는 돈. 일하며 돈을 벌던 기간보다도 더 긴 세월을 수입 없이 살아야 하는 게 현실이니…. 그렇다 해도 결단은 할 만하다. 캐플런처럼 ‘감당해야 할 위험’의 잣대로 재보면. 여행을 즐기면 경제적으로 그만큼 어려워진다. 그런데 여행을 포기하면 죽는 날까지 그걸 후회하며 살아야 한다. 답은 자명하다. 후회는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으므로. 캐플런은 죽어서도 말한다. 후회 없는 삶, 그게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