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송평인 칼럼]친노 하루 만의 돌변, 무섭다

입력 | 2016-03-23 03:00:00

조국 문성근 등 친노 핵심, 김종인 비례 2번 맹공
칩거중인 문재인 뜻 헤아려… 하루 만에 수용으로 돌변
좌익의 贊託 돌변 떠올라
친노, 일단 참고 있지만 총선 이후 패권 재장악할 것




송평인 논설위원

친노(친노무현)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20일 분노로 달아올랐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비례대표 2번 셀프 공천이 밝혀진 날이었다.

친문(친문재인)으로 불리는 신(新)실세 친노 조국 서울대 교수는 이날 페이스북 글에서 “법정관리인으로 초빙된 김종인이 ‘대표이사’가 됐다”고 비판했다. 그러던 그가 다음 날 오후 김 대표의 순번이 14번으로 조정된 지 몇 시간 뒤에는 돌변했다. 그는 “14번은 김 대표에게 모욕을 준 것”이라며 “순위는 그분에게 맡기는 것이 예의”라고 썼다.

원조 친노 문성근 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20일 김 대표의 “비례대표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과거 발언 기사를 링크하며 김 대표의 말 바꾸기를 비판했다. 이어 다음 날 오전 김 대표가 비대위 회의에 불참하는 등 당무를 거부하자 “후안무치도 유분수”라고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그러더니 그날 밤에는 “우리에게는 승리가 목표다. 김 대표의 비례 2번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며 돌아섰다.

SNS로 이런 드라마틱한 표변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는 건 드문 일이다. 마치 누군가의 지령을 받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21일 밤 12시 가까운 두세 시간 사이에 김 대표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 존중으로 바뀌었다.

사실 김 대표에게 비례 2번을 제안한 것은 문재인 전 대표였다. 김 대표는 13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문 전 대표가 1월 자신을 영입하러 왔을 때 비례 2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문 전 대표는 어제 기자회견에서 “저라도 김 대표를 상위 순번에 모셨을 것”이라며 앞서 그런 제안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친노가 문 전 대표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을 따름이다.

원로 친노 함세웅 신부는 SNS로 의견을 바꾸지도 못하고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함 신부는 21일 오후 재야 원로들과 함께 이례적으로 기자회견까지 열어 더민주당 중앙위를 향해 “김 대표의 셀프 공천을 취소하고 당선 가능성의 경계선으로 추정되는 15번 아래로 내려 보내라”고 요구했다. 비대위가 김 대표의 순번을 14번으로 조정할 때만 해도 함 신부의 압박이 먹히는 듯했다. 그러나 재야의 친노도, 비대위도, 중앙위도 지도자의 뜻을 잘못 읽었을 뿐이다. 지도자의 뜻이 전해지자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이 정도 되면 해방 정국에서 좌익이 모스크바삼상회의 신탁통치 소식을 전해 듣고 반탁에 나섰다가 하루아침에 찬탁으로 돌아선 것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과장된 연상이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당은 항상 옳다(Das Partei hat immer Recht). 칩거하고 있는 당 지도자이긴 하지만 당 지도자의 생각은 항상 옳다. ‘내’ 생각이 당 지도자와 달랐다면 ‘내’가 의견을 바꿔야 한다. 그래도 지식인이라면 최소한 자아비판이라도 하고 의견을 바꾼다. 그런 것도 없었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같은 일부 친노는 여전히 저항하고 있다.

친노의 판단 착오 덕분에 4·13총선 이후 더민주당에서 전개될 사태의 예고편을 우연히 볼 수 있었다. 당이 상영을 원치 않았던 예고편이라는 점에서 스포일(spoil)의 성격이 짙다. 물론 스포일이라고 해봐야 다들 예상하고 있는 뻔한 시나리오다. 적절한 때가 되면 오너가 다시 등장해 바지사장을 몰아내고 당을 장악한 뒤 대권에 도전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반항의 친노가 고개를 숙이자 바지사장의 기세가 등등해졌고 영화가 예상보다 흥미롭게 전개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기승전‘문(재인)’이라는 기본 플롯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 장제스의 군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마오쩌둥의 군대는 옌안으로 대장정에 올라 살아남았다. 안철수 분당의 파장이 당을 침몰시키기 직전에 문 전 대표는 경남 양산으로 후퇴해 침몰을 막았다. 이 과정에서 막말 정청래 의원 등 몇몇이 희생됐지만 큰 손실은 없었다. 이해찬 의원은 무소속으로 출마해도 살아 돌아올 것이다. 문희상 백군기 의원 등은 쳐내는 시늉만 하다가 복귀시켰다. 윤후덕 의원도 살아남았다. 공천도 다 끝나 간다. 끝내기 수순인데 형세 판단도 못 한 자들이 판을 망칠 뻔했다. 칩거하던 오너가 부랴부랴 올라왔고 바지사장을 간신히 설득해 봉합한 것이 지난 3일간의 해프닝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