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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이지 않아서 행복한 유부녀, 정인

입력 | 2016-03-23 11:28:00


순백의 웨딩드레스 대신 등산복을 입고, 화려한 결혼식 대신 지리산에 올랐다. 상식적이지 않은 결혼 방식만큼이나 특이한 신혼 생활을 즐길 것 같은 ‘미워요’의 가수, 정인을 만났다.



달콤한 신혼 생활의 영향일까. 요즘 들어 부쩍 ‘예뻐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힙합 듀오 리쌍 사이에서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애절한 발라드곡 ‘미워요’로 사랑받아온 여성 보컬 정인(37) 얘기다. 지난 2013년 오랜 연인이었던 뮤지션 조정치(39)와 공식적인 부부가 된 그녀는 올해로 결혼 생활 3년 차를 맞았다. 지난 1월에는 다섯 번째 미니 앨범 〈rare〉도 발표했다. 다른 뮤지션과 공동으로 작업한 앨범을 낸 적은 있었지만, 결혼 후 단독으로 앨범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가수 정인을 서울 마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동그란 안경에 수수한 차림. 있는 그대로의 정인이다. 무대 위에서 짙은 메이크업을 하고 남다른 포스를 풍기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결혼 후 달라진 게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제 대답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죠. 10년 넘게 연애하다 결혼해서인가 봐요. 그냥 모든 게 자연스러워요. 결혼식을 따로 하지 않아서인지 딱히 ‘이제는 유부녀구나’ 하는 생각도 잘 안 들고요(웃음).”

그녀는 지난 2013년 11월 가수 조정치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연예계 공식 커플이었기에 결혼 소식 자체는 놀라울 것이 없었지만, ‘결혼식 대신 지리산 종주를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는 참 신선했다.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며칠 후엔 지리산 천왕봉의 비석 앞에서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도 공개했다. 면사포를 연상하게 만드는 하얀 천을 머리에 두르고 조정치와 입맞춤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제가 복잡하고 머리 아픈 걸 싫어해요. 혼인신고만 하고 같이 살려고 했는데, 엄마가 ‘그래도 뭔가 상징적인 일을 하나쯤은 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같이 해외여행을 갈까도 생각했는데 굳이 외국까지 가야하나 싶었고, 제주도에서 결혼을 할까도 생각했는데 그러면 지인들을 초대해야 할 것 같았죠. 그래서 선택한 게 지리산 종주였어요(웃음). 제가 원래 산을 좋아해요. 20대 땐 동아리에 가입해 전국에 있는 산을 한 달에 한 번꼴로 오를 정도로 등산 마니아였거든요. 결혼을 기념해 정치 오빠와 함께 산에 오르면서 마음가짐을 다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리산 종주 코스를 함께 걸으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산불 방지 시즌과 겹쳐 길이 막혔다. 부부는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1박 2일 산장에서의 첫날밤은 어땠냐고 묻자 정인이 말했다. “남녀 각방이었는데요?” 결혼 후 어떻게 살자는 논의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오르막과 내리막을 함께하며 산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을 즐겼다. 굳이 서로가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진 않았지만, 앞으로 부부가 살아갈 인생 역시 그러하리라고 생각했다. 지난 결혼기념일엔 둘이서 축하 케이크도 잘랐다고 했다. 그러더니 이내 “가만, 그게 재작년의 일인지, 작년의 일인지 가물가물하네요” 하고 말했다.

“사실 결혼기념일을 언제로 쳐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요. 지리산에 오르기 시작한 날을 꼽아야 할지, 정상에 오른 날로 해야할 지, 정상에서 내려온 날로 해야 할지 헷갈려요. 그렇다고 구청에 혼인신고를 한 날을 결혼기념일로 하기도 애매하고요. 사람들은 ‘조정치와 정인이 몇 월 며칠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야기하고 싶어하는데, 정작 우리에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결혼 전 가수 정인은 연인 조정치와 함께 가상 결혼 생활 프로그램인 MBC 〈우리 결혼했어요〉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당시 낯간지러운 애정 표현은 없었지만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둘의 모습은 연애 기간 10년의 내공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혼인신고 두 달 전인 2013년 9월에는 조정치가 정인에게 깜짝 프러포즈를 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프러포즈는 제 취향이 아니었어요. 서로가 사랑하는 걸 아는데 굳이 ‘나랑 결혼해줄래?’ 하고 말하는 게 유치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프러포즈를 받아보니 왜 여자들이 이걸 좋아하는지 알겠더라고요.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마음을 확인받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후회는 없지만, 결혼식을 했어도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늘 있는 법이잖아요.”



바람처럼 살아온 부부의 사랑법 흘러가는 대로, 내키는 대로 사는 것. 그녀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다. 어떤 목표를 세워놓고 계획적으로 달려가기보다는 현재 생활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온 그녀였다.

“제 삶의 좌우명이 ‘재밌게 살자’예요.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맡기고 살았던 거죠. 그런데 남편은 저보다 더 바람 같은 사람이에요(웃음). 저희를 두고 비전과 계획 없이 사는 것 같다고 걱정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래서 더 둘이 잘 맞나 봐요. 서로에게 바라는 점이 없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방법을 아니까 다툴 일도 거의 없거든요.”

결혼 후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녀에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제 혼자가 아닌 둘이기에 함께 마음을 맞춰 해야 할 일들이 생긴 것이다. 올해 초엔 부부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한 해의 대략적인 지출 계획을 세웠다. 잔뜩 움켜쥐고 사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부부의 스타일 덕에 6개월쯤 전엔 전보다 보증금이 더 높은 새집으로 이사도 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부부를 닮아 단란한 공간이다.

“하얀 수건을 쓰고는 바닥에 팽개쳐두고, 양말도 아무 데나 벗어두는 모습이 되게 신경이 쓰였죠. 제가 청소하고 있는데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화도 났고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걸 내려놓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아요. 제가 청소하고 싶을 때 남편은 쉬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중요한 건 타이밍이에요. 오빠가 근래 들어 혼자서만 청소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땐 제가 먼저 일어나서 청소기 돌려야죠. 뭐든 적당히 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상대방 열 받기 전에요(웃음).”

정인의 인스타그램에는 자신이 직접 만든 요리 사진이 종종 올라온다. 예쁜 그릇에 정갈하게 내놓은 반찬만 봐도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그녀는 “주방에서 일하는 건 꼭 게임을 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며 아이처럼 웃었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을 비워가는 데서 뭔가 만족감이 느껴져요. 저 좀 특이한가요? 상해서 버리는 음식이 없도록 식재료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게 요즘의 낙이에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주방을 정리하고 있을 때도 있어요(웃음). 어쩔 땐 일종의 보상 심리가 생겨요. 제가 이렇게 집안일에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요.”

부부는 올해 안엔 2세를 가지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원래 격식을 차리는 것은 영 성미에 맞지 않지만, 아기가 태어나면 돌잔치는 열어줘야 하지 않나 고민도 된다. “제 잔치가 아니라 아이 잔치니까요(웃음).” 신혼은 이렇게 달달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와 엮일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은 들었던 것 같아요. 그게 남들이 말하는 ‘후광이 비친다’는 건가 봐요. 그래서 제가 먼저 오빠를 찔러봤어요. ‘대시(Dash)’까지는 아니었고 일종의 ‘낚시’였죠(웃음). 제가 과하게 낙천적인 성격이라면 오빠는 무척 우울한 사람이었어요. 전 오히려 오빠의 그 우울함이 좋았죠. 너무 밝기만 한 건 감성적인 음악을 하기에 때로 방해가 되기도 하잖아요. 결혼을 하고 나니 저의 밝음과 오빠의 우울함이 점점 밸런스를 찾아가는 느낌이에요.”



일곱 살 때 잃은 청력, 내가 생각하는 게 정답 이번 앨범의 첫 번째 트랙인 ‘비틀비틀’은 남편 조정치가 기타를 연주하고 정인이 노래를 불렀다. ‘비틀비틀 걸어도 흘러갈래’라는 정인의 가사가 군더더기 없는 기타 연주와 어우러진 점이 곡의 묘미다. 자연스러운 느낌을 위해 부부는 함께 스튜디오에 들어가 한 번에 녹음하는 방식을 택했다. 총 세 번을 녹음했는데 그중에서 첫 번째 테이크를 앨범에 실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앨범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에요. 오랜만에 앨범 준비를 하면서 ‘망치면 어떡하지?’ ‘성과를 못 내면 어떡하지?’ 하고 조바심이 났거든요. 그런데 가사 중에 이런 말이 나와요. ‘오늘도 내일도 어제가 될 뿐이야’. 이 한 줄이 제게 깨달음을 줬어요. 지금 힘들다고 칭얼대는 모든 일들이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사실 정인은 일곱살 때 왼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처럼 소리의 방향이나 입체감을 파악하기 어렵다. 한쪽 귀로 세상을 듣는 그녀의 음색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한쪽 귀가 안 들리는 게 저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런 사연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제 왼쪽에 서면 ‘왼쪽 귀가 안 들려서 그런데 오른쪽에 서주세요’ 하고 이야기를 하죠.”

최근에는 음악 프로듀싱 레슨도 받고 있다. 한 번은 수업에서 음악을 듣고 똑같은 사운드를 만들어 오라는 과제를 받고 난감했던 적도 있다. 정인이 들을 수 있는 소리 자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탓이다.

“음악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데 있어서는 불편함을 느낄 때가 많아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결국 ‘내 기준대로 하자’죠. 남들과 다를 순 있지만 틀렸다고 볼 순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그게 저만의 색깔이 될 수도 있고요.”

소리의 디테일은 다를지라도 음악을 통해 전달되는 진심은 통하는 법. 정인이 더 감성을 담아 노래하는 이유다. 이번 앨범의 타이틀 곡인 ‘UUU’ 역시 정인의 애절한 보이스가 돋보이는 노래다. 곡의 반주와 앨범의 전체적인 프로듀싱은 피아니스트 겸 가수 윤건이 맡았다.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땐 ‘발성’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저 힘으로만 노래를 불렀거든요. 감정을 담아 부르는 것도 잘 못 했어요. 이별 노래를 부르면서 가사 속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건 ‘이해’지 ‘이입’이 아니에요. 요즘은 제 자신을 가사 속의 주인공에 대입하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몰입이 잘된 날엔 노래를 한 곡 하고 체력이 금방 바닥나요.”

예전에는 굳이 음악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할 일이 무척 많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자신감이었다. 요리하는 데 흥미가 있어 ‘맛없는 밥집’을 콘셉트로 한 식당을 구상했던 적도 있고, 트럭을 타고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3천원짜리 김치찌개를 파는 엉뚱한 상상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에게 음악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됐다.

“힘든 일이 있어도 ‘난 상처 따윈 안 키워’ 하면서 웃어넘기는 편이에요. 그런데 사실 그게 상처가 아닌 것은 아니에요. 전 제 속마음을 표현하는 데 많이 서툴러요. 진짜 상처는 혼자서만 간직하는 식이죠. 어떤 사람들은 저처럼 상처를 감추고 사는 게 정말로 건강한 게 아니라고 하잖아요. 제가 그나마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건 음악을 해서인 것 같아요. 노래할 때는 마음껏 슬픈 내색을 할 수 있으니까요(웃음). 좋은 아티스트로 성장하려면 이제 그런 상처들도 꺼내서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제가 요즘 하는 고민이에요.”

주방 일과 음악, 요즘 그녀가 푹 빠져 사는 두 가지다. 그녀는 인터뷰 말미에 “주방 일이 엔조이라면 음악은 조정치”라고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하루하루 그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시키는 건 결국 음악과 조정치라면서.





글 · 정희순 | 사진 · 리쌍컴퍼니 제공 | 디자인 · 김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