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완지시티 기성용.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 영국에서 만난 쌍용, 그들이 꿈꾸는 미래
기성용=어릴 땐 그저 국가대표만 바라보고 뛰었어
이젠 육아·잔심부름에 장까지 보느라 바빠
사건사고도 많았지만 아빠 되고 철 들었지
이청용=언제 호출 받을지 몰라 꾸준히 몸 만들어야
솔직히 지난 겨울이적시장 땐 고민 좀 했어
아직은 여기서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
● 시련&도전
기성용(이하 기)=시즌이 얼마 남지 않았네. 우리가 FA컵에서 일찌감치 탈락했고, 자연스레 휴식시간이 길다보니 컨디션을 열심히 관리하고 있는데, 마음처럼 마지막까지 잘 풀려야 할 텐데.
이청용(이하 이)=그래도 넌 경기라도 꾸준히 나가잖아. 난 솔직히 요즘 잘해보지 못했던 경험을 하고 있어. 솔직히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이야. 기약 없는 기다림. 그런데 언제 호출 받을지 몰라 꾸준히 몸은 만들어야 하니…. 이런 것이 멘탈 훈련이 아닐까 싶어.
기=그래서 가족들이 있는 것 아냐(기성용의 아내 한혜진 씨와 딸 시온 양은 올 1월부터 스완지에 함께 머물고 있다). 예전 싱글로 지낼 때는 홀로 버티는 게 내가 할 일이었는데, 솔직히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 육아에 힘을 보태려고 해. 최대한 많이 놀아주고, 잔심부름도 열심히 하고. 카시트 정리하고, 장을 보고.
기=친구들과 동료들도 빼놓을 수 없지. 지금 대표팀의 많은 동료들이 런던 일대에 전부 모여살고 있잖아. 아무래도 난 조금 멀리 떨어져 있고(스완지는 런던에서 고속열차로 3시간 거리). 어릴 적에는 실감하지 못했는데, 요즘은 솔직히 비행기 타는 게 가장 힘들더라. 작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몸이 먼저 말해주는 것 같아. 넌 그렇지 않아?
이=먼저 정신적인 스트레스라니까. 경기 하루 전까지 선발출전이 예고돼 있다가 하루 사이 결정이 바뀌어버리는 통에 혼란이 많아. 이 때 코칭스태프로부터 뭔가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통 해주시지 않으니. 팀도 워낙 침체기에 있고. 서운하더라도 지금으로선 참는 수밖에 없지.
기=그래, 그럴 거야. 나도 얼마 전까진 그랬잖아. 네가 (볼턴에서) 꾸준히 출전하는 동안 난 임대도 경험했고, 이유 없는 결장도 반복했으니. 어쩌면 (이)청용이 넌 조금 그 시기가 늦게 왔다고 봐. 우리 고충은 비슷할 거야. 밖에선 잘 이해하기 어려운. 아시아 선수이라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든지, 아무 것도 즐길거리가 없는 황량한 곳에서 아는 이들도 없이 홀로 외로움과 싸운다든지.
이=예전에 내가 참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싶어. 그래도 배우는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벤치에 앉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팀원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됐으니. 출전 기회를 많이 잡지 못한 동료들이 어떤 심경이었는지 새삼 이해하고 있어. 이런 감정은 참 좋은 공부라고 생각해. 그렇다고 과거가 딱히 그립진 않아. (못 뛴다는 사실에) 적응이 덜 됐을 뿐이지.
기=생존을 위한 엄청난 고통. 나도 하루하루 많은 공부를 해. 나중에 해외에 도전하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크리스털팰리스 이청용.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 열정&비전
이=지난 겨울이적시장에 사실 고민을 좀 했어. 정말 떠나야 하나? 그게 옳은 건가? 선수는 땀 흘리며 필드를 누빌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으니. 기회를 찾아가려 했지. 그런데 워낙 부상자가 많다보니 앨런 파듀 감독께서 남아줬으면 하시더라고. 그래서 일단 한 시즌 끝까지 잘 마쳐야겠다 싶었어. 다만 지금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리고 여름이적시장이 열린다면 또 모르지.
기=난 우리도 환경만 조금 다를 뿐, 계약직 직장인이라고 생각해. 다만 나라는 선수를 프리미어리그에서 뛸 수 있도록 해준 팀이라 고마움은 정말 커. 그래도 세상에 축구선수란 직업을 지닌 사람들은 많고, 그 한 부분이 잉글랜드잖아. 아직까지는 난 만족하고 감사함을 갖지만 앞날은 또 모르지.
이=우리가 팀을 선택할 때 단순히 금전적 조건만 보지 않지. 발전의 여지, 비전에 최우선 기준을 삼잖아. 크리스털 팰리스가 그렇긴 해. 점차 발전의 여지가 있었고, 투자도 좀더 적극적으로 할 것 같았어. 더욱이 파듀 감독께서 부임 후 첫 이적시장에서 날 선택해줬으니, 이 팀에 오는 건 나름 쉽게 선택했던 것 같아.
기=난 다른 길을 진지하게 고민하긴 했어. 꼭 스완지시티가 아니어도. 역시 클럽의 철학이 날 사로잡았지. 내가 추구하는 축구를 할 수 있는 팀이란 점이 중요했어. 챔피언십(2부리그)에서 승격한 팀이라 환경적인 부분은 좀 부족하긴 했지만, 다행히 차츰 발전을 했으니. 넌 다른 리그는 생각 안 해봤어?
이=솔직히 전혀 생각이 없다면 거짓이지. 다만 볼턴에서 팀을 옮길 때는 잉글랜드가 최우선이었어. 물론 지금도 크게 생각이 다르진 않아. 프리미어리그가 주는 매력과 이곳에서 성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크지. 다만 가능성은 열어두려고.
기=어릴 적에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를 동경했어. 환경이나 조건이 맞지 않아 기회가 열리지 않았지. 이제는 내가 가장 사랑받고 꾸준히 경기를 뛸 수 있다면 그 행선지가 어디든 크게 상관없다고 봐. 그런데 크리스털 팰리스나 우리나 경기력 자체는 조금 부족하지?
이=우리 감독님도 생각이 굉장히 복잡할 거야. 11∼14명으로 거의 한 시즌을 소화하고 있는데, 벤치에서 기다리는 이들에게도 좀더 기회를 주고, 몸 관리를 시켰다면 좀더 좋지 않았을까.
기=난 내 자신이 어려웠거든. 시즌 첫 경기부터 부상을 당했고, 딸이 태어나 한국을 왕복하고, 잔 부상에 시달리고, 대표팀을 오가느라 팀 성적도 조금 불안했고. 여러 면에서 처음 내 생각과 전부 반대로 돌아갔어. 그래도 두렵진 않아. 몇 경기를 빠지더라도 그로 인한 불안감은 딱히 없어. 일단 내 길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고 있어.
● 꿈&현실
이=요즘 내가 부쩍 성장한 것 같아. 예전에는 나 혼자만 생각했는데, 해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무가 아닌, 숲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생겼어. 내 가족, 우리를 보며 힘 낼 수 있는 팬들까지.
기=축구를 하는 이유가 많지. 역시 가족이 크지. 어릴 때는 그저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생각만으로 축구를 했는데, 지금은 내 일에 최선을 다하는 떳떳한 선수와 멋진 가장을 향해 뛰고 있으니.
이=확실히 우리가 철은 들었어. 기량이 크게 발전했다고 생각은 하지 않지만, 항상 꾸준하게 훈련하고 컨디션을 만들고 최상의 몸을 유지하려는 자세부터 달라졌으니.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과정이 헛되진 않았다고 봐.
기=어릴 때부터 호주에서 지내면서 부모님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었고, 프로에도 일찍 들어와 사회생활을 빨리 시작하면서 철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내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시간이 있었어. 그로 인한 사건사고도 많았고. 다행히 지금은 감정과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고, 눈도 넓어졌어.
이=땀과 노력을 얼마나 투자하느냐가 좋은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를 가르는 기준이라고 생각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고도 과연 축구에 올인할 수 있는 자세가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리라 봐. 여전히 많은 외국 클럽에서 한국선수를 인정하고 찾는다는 것은 결국 성실함이잖아. 일단 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 단순히 삶의 가치가 출전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가진 것보다 훨씬 큰 인정도 받고 있고.
기=그래, 맞는 이야기야. 우리가 조금 부진해도 질타를 받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가 커졌다는 것을 보여주잖아. 항상 들뜨지 않고 냉정하게, 언제 어디서나 초심을 잃지 않고 뛰면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우린 참 행복한 선수들이야. 우리 지금처럼 늘 멋지게 해보자. 지금껏 잘해왔잖아. 힘내자고. 파이팅!
런던·스완지(영국) |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