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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김유영]‘필기 수재’를 키우는 학교

입력 | 2016-03-24 03:00:00


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최근 해외 석학이 강연하는 자리에 갔다. 강연장은 학구열로 넘쳐났다. 참석자들은 필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마트폰으로 찰칵 소리를 내며 파워포인트 파일을 찍는 민폐를 불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강연 후. 그렇게 열심히 강의를 듣던 사람들은 “질문이 있느냐”는 사회자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강연은 서로를 어색하게 쳐다보다 끝났다.

우리에겐 익숙한 한국적인 풍경일 것이다. 한국에 온 외국인 교수들은 굳이 강의실이 아니어도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정보를 받아 적기에만 바쁘다면 대체 교육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고 한다.

기자가 미국에서 대학원 수업을 들었을 때를 떠올려보면 그럴 법도 하다. 수업을 이해하려면 학생들은 최소 30∼40쪽 분량의 교재를 읽어 가야 했다. 교수가 학생을 갑자기 지명해서 질문하는 ‘콜드 콜(cold call)’도 부담이었다.

교수는 자신을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촉진자)’로 칭했다. 학생들의 생각을 이끌어내 어떤 결론에 이르게끔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 토론 뒤엔 ‘테이크어웨이(take-away)’를 내라는 교수도 있었다. 직역하면 수업 시간에 자신이 얻은 것을 적는 것. 정답은 없었다. 자신이 깨닫고 생각한 걸 내면 그만이었다.

10년 넘게 정답이 있는 교육을 받았던 기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고민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이미 누군가가 낸 결론을 외우는 데에 익숙해져 있지 않았던가. 실제로 학부 시절 영문학을 전공한 기자는 중세시대 영시에 고어(古語) 전치사를 끼워 넣는 시험이 고역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전치사, 굳이 외워야 했나 싶다. 정 필요하면 검색하면 되고, 오히려 영시에 나온 삶과 의미를 읽어내는 노력이 중요하지 않았을까.

김용학 연세대 총장은 말한다. 현재 대학교육 모델은 평균 수명이 60세였던 산업 사회 초기에 개발된 것으로, 전공지식을 주입해 산업현장에서 30년 동안 써먹기 위한 대량 교육 시스템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지식과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문제다. 시험 문제용 정답을 찾으려면 인터넷 등 지천에 널려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자신에게 필요한 걸 골라내고 생각하는 힘, 사고를 구조화해서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역량을 기르는 교육일 것이다.

다행히 변화의 조짐은 있다. 학교에서 배우고 집에 가서 숙제하는 기존 교육과 달리 집에서 지식과 정보를 먼저 습득하고 학교에서 실험, 토론, 문제 해결 프로젝트 등을 하는 일명 거꾸로 교육(flip-learning)이다. KAIST 등 일부 대학이 실시하지만 여전히 제한돼 있다.

고성장 시대에는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성적 받으면 좋은 직장에 갔고 그걸로 좋은 삶이 제법 보장됐다. 지금은 저성장이 고착화됐고 게다가 100세 인생을 논하는 시대다. 좋은 학교 나온들, 좋은 성적 받은들, 좋은 직장에 간들 불안감에 떠는 게 현실이다. 고로, 틀리면 끝장인 시절을 견딘 우리에게 알파고가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매년 수업료를 1000만 원이나 내는 대학에서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만 배우기엔 아깝지 않나요?”
 
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