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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치혁 기자의 축구생각]사이버 축구, 그라운드 습격사건

입력 | 2016-03-25 03:00:00


‘과부 제조기.’

적에 대한 살상력이 극도로 좋지만 반대로 결함이 많아 아군의 피해도 많은 무기를 일컫는 이 무시무시한 단어가 영국에서는 축구 감독 시뮬레이션 게임 ‘풋볼 매니저’의 별명으로 쓰인다. 이 게임을 하면 누구나 실제로 감독이 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워낙 완성도가 높아 남편들이 밤을 새워 게임에 빠져드는 바람에 아내들이 ‘생과부’가 됐다는 것이다.

알파고와 이세돌이 벌인 대결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알파고가 축구에는 아직 관심이 없는 듯하니 축구 감독들은 발 뻗고 자도 될 듯하다. 하지만 실체가 없는 사이버 세상의 축구는 어느덧 현실의 축구 그라운드를 잠식하고 있다.

2012년 아제르바이잔의 FK 바쿠는 21세의 새파란 젊은이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전 세계 1부 리그 최연소 감독이 된 주인공은 부가르 후세인자데. 축구 관련 경력은 10년간 해 온 ‘풋볼 매니저’ 게임이 전부다. 사이버 세상의 감독이 현실의 감독이 된 것이다.

우려의 시선에도 후세인자데는 강등권에 있던 팀을 상위 스플릿으로 올려놓았고 그 다음 시즌에도 팀을 중위권에 안착시킨 뒤 팀을 떠났다. 게임의 명수답게 후세인자데는 ‘풋볼 매니저’를 통해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루마니아 출신 공격수를 영입해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알파고가 그렇듯 방대한 정보가 이 게임의 무기이다. 전 세계 1300명의 스카우트가 각국의 하부 리그 선수까지 능력치를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한다.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알 마드리드도 넘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빅 클럽의 스카우트들도 이젠 유망주 발굴을 위해 이 게임을 활용하고 있다.

다양한 전술을 자유롭게 시험해 볼 수 있는 것도 가상세계 축구의 장점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참신한 전술로 주목을 받았던 키케 플로레스 왓퍼드 감독, 미카엘 라우드루프 전 스완지 감독 등은 지도자가 되기 전 이 게임을 통해 ‘선행학습’을 했던 1세대 주자들이다.

축구 기록이 득점, 도움, 출전 시간에 그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젠 경기장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로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추적한다. 이런 추적 시스템은 영상과 수치화된 자료로 저장된다. 패스, 질주, 경합 등의 횟수와 성공 여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특정 상황에서 선수가 올바른 위치에 있었는지, 시시각각 변하는 경기 도중 선수의 판단 능력도 검증할 수 있다. 연봉 협상 테이블에서 ‘최선을 다했다’, ‘열심히 했다’는 말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선수들이 감독의 눈보다 분석 시스템의 카메라를 더 무서워한다”고 프로팀 관계자가 말하는 시절이 됐다.

2014년부터 ‘풋볼 매니저’ 제작사와 영상 추적 시스템 업체가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코칭스태프의 주요 업무인 전술과 육성, 스카우트 업무가 컴퓨터를 통해 통합되고 있다. 100년 넘게 쌓인 전문가 집단의 업무가 후세인자데처럼 축구 현장은 몰라도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도전할 수 있는 대상이 됐다. 그리고 이런 토대 위에 판단과 결정을 내릴 알파고의 두뇌가 합쳐진다면 사이버 감독의 탄생이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장치혁 기자 jang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