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특파원·국제부
벨기에는 유럽연합(EU),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를 비롯해 2500여 개 국제기구와 기업이 몰려 있는 ‘유럽의 심장’이다. 서유럽 국가 중 인구 대비 이슬람국가(IS) 전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유럽 지하디스트의 수도’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벨기에의 테러 대응 능력에 국제사회가 경악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벨기에 형법의 ‘9 to 5’ 조항이다. 벨기에 경찰은 오후 9시부터 이튿날 오전 5시까지 가택 수색을 할 수 없다. 1969년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만든 법이라지만 외신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경찰과 달리 테러범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비난 여론이 들끓자 샤를 미셸 총리는 당시 국회 연설에서 18가지의 새로운 조치를 담은 ‘대(對)테러 법안’을 제안했다. 가장 눈에 띄는 대책은 테러와 연계된 것으로 의심될 경우 경찰이 언제든지 가택 수색을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이후 벨기에 정치권은 차일피일 법안 통과를 미뤘고, 4개월 뒤 결국 브뤼셀 테러가 일어나 31명이 숨지고 330여 명이 부상했다.
미국 정치 매체 폴리티코는 브뤼셀 테러의 근본 원인을 ‘벨기에의 정치 실패’로 규정했다.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독일어 언어권으로 분열된 벨기에 정치권은 매번 총선과 연정 구성 협상 때마다 권력을 지방으로 복잡하게 배분하는 ‘나눠 먹기 협상’을 벌여 왔다. 브뤼셀 수도권특별지역만 해도 치안을 19개 자치시와 6개 경찰서가 나눠 맡고 있어 테러범에 대한 정보 공유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IS의 발호 이후 세계는 ‘테러 위협이 상존하는 사회’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47년 묵은 ‘9 to 5’ 법도 개정하지 못하는 벨기에의 무능한 정치권을 보면서, 자신의 표밭만 생각하는 정치인들의 싸움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시 한번 깨닫고 있다. ―브뤼셀에서
전승훈 특파원·국제부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