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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정화조 청소약품으로 가습기 살균제… 국가도 기업도 눈감아”

입력 | 2016-03-29 03:00:00

사건 첫 제기-원인규명한 홍수종 교수




홍수종 교수

“배 속의 둘째 때문인지, 자꾸만 숨이 차요.”

2008년 봄 폐 손상으로 서울아산병원 어린이병동에서 산소마스크로 겨우 숨쉬던 3세 아영이(가명)를 돌보던 만삭의 엄마가 숨쉬기 힘들어했다. 얼마 후 고향으로 내려갔던 아영이 엄마는 둘째를 낳다가 숨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인은 원인 미상의 폐부전증.

어린아이가 계속 죽었다. “원인을 찾겠다”고 부모를 달랬지만, 갈수록 의사로서 해 줄 수 있는 말이 줄었다. 폐가 딱딱하게 굳고 손상되는 ‘섬유화’ 현상이 역력했다. 나는 “아이들이 급성 간질성 폐렴이라는 원인 불명의 병으로 죽어 간다”는 논문으로 이 사실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선생님이 보셨던 환자와 증상이 비슷합니다.”

2011년 봄, 호흡기 중환자 병동에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만삭 산모 4명이 한꺼번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또 그 녀석이구나.’ 질병관리본부가 의료계 권위자들로 구성된 역학조사팀을 꾸렸다. ‘감염은 아닌 것 같다’, ‘기도를 통해 들어가는 뭔가가 있다’라는 의견이 나왔지만, 결론은 명확하지 않았다.

엄청난 바이러스의 가능성마저 의심했던 나는 정부의 역학조사와 독성 실험 결과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으로 결론 나자 허탈한 마음마저 들었다. 2011년 8월 역학조사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사용자가 폐 질환에 걸릴 확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47.3배 높았다. 건조한 가을철을 앞둔 만큼 모든 국민에게 알려야 했다.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 수거 명령을 내렸다. 기업들은 “영업을 방해한다”며 불편해했다.

이후 내게는 법원이 보낸 ‘사실 조회 요청’ 공문이 세금고지서처럼 철마다 날아왔다. 피해자들이 손해배상 소송을 낸 모양이었다. 판사들은 “가습기 살균제가 아니라 세균 감염의 가능성은 없습니까”, “바이러스나 곰팡이 때문은 아닙니까”라고 물어 왔다. 법률 조언을 받은 기업이 여러 가능성을 물고 늘어졌고, 중간에 끼인 판사는 전문 지식이 부족해 보였다. 경찰과 검찰은 연락 한번 없었다.

최근 서울중앙지검 가습기 사건 수사팀이 나를 방문해 핵심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하겠다고 요청해 왔다. 늦었지만 반가웠다. 검찰은 환자 개별 사례의 특성, 역학조사 과정과 동물실험 과정 전반을 조사했다.

나는 그간의 연구 결과와 사례, 살균제와 사망 간 인과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했다. 의료 윤리상 환자들에게 가습기 살균제 성분을 직접 투여해 인과관계 실험을 할 수 없었던 사정도 설명했다. 수거 명령이 난 뒤엔 두 해가 지나도록 추가 감염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한 대기업이 한 대학에 의뢰해 가습기 살균제와 폐 손상의 인과관계가 없다는 실험 결론을 검찰에 냈다고 한다. 어떤 실험 조건을 설정했는지 몰라 구체적으로 답변하기 어렵지만 실험실 연구는 조건에 따라서 다양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질병관리본부의 실험 결과처럼 인과관계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조건이 설정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호흡기 분야 최고 권위지인 미국호흡기중환자학회지에 “소아환자(138명) 역학조사와 사용 금지 명령 이후 2년을 추적한 결과 가습기 살균제가 폐 질환의 원인”이라는 우리의 논문이 등재됐다.

가습기 살균제 원료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은 외국에선 수영장이나 물탱크, 정화조를 청소하는 데 주로 쓰인다. PHMG로 소비재인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매출을 높인 ‘창의적인’ 누군가는 회사에서 큰 상을 받았을 것이다. 약품의 용도가 바뀌면 인체 영향에 대한 새로운 검증을 받는 시스템이 있어야 했지만 국가도 기업도 눈을 감았다. 다들 ‘나는 안전하다’라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우리 사회에 이처럼 큰 ‘구멍’이 나 있었다.

커다란 덩치의 아버지가 아이를 잃고 내 어깨에 기대 펑펑 울었다. 학자로서, 그리고 이 땅의 아버지로서 나는 괴로웠다. 해외 주재원인 아버지가 아이와 아내를 위해 가습기 살균제 6개월 치를 사 놓고 떠났다면, 이는 누구의 잘못인가.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이 기사는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 호흡기알레르기과 홍수종 교수(56·서울아산병원 환경보건센터장)를 인터뷰한 내용을 홍 교수 시점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