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평론가
연산군 10년(1504년) 10월의 ‘조선왕조실록’이다. 사슴꼬리 때문에 애꿎은 관찰사의 목이 떨어질 판이다. 연산군, 누구나 알듯이 해괴한 짓 많이 했다. 그중 하나다. 연산군이 사옹원에 명한다. “녹미는 모름지기 꼬리가 있는 것으로 올리라. 관찰사도 부엌의 반찬을 보고 좋고 나쁨을 따진다. 하물며 궁중에 올리는 물건이야 말하면 무엇하랴? 앞으로 사옹원에서는 관찰사가 올리는 녹미의 색깔과 맛을 살펴보고, 나쁜 것이 있으면 조사하라. 이조에서는 장부에 기록하라. 6개월에 3번 이상 질 나쁜 녹미를 올리는 관찰사가 있으면 비록 근무성적이 최고라 하더라도 파면하라.”
입이 짧기로 소문난 영조도 녹미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많이 남겼다. 영조 40년(1764년) 4월 “사슴꼬리나 메추라기고기도 내가 전에 즐겼던 것들이나 올리지 말라고 했다. 역시 민폐가 될까 두려워서이다”라고 했다. 이쯤 되면 사슴꼬리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영조 48년 11월에도 “오늘 젓가락을 댄 것은 오직 녹미뿐이다. 맛있다고 해서 어찌 어질지 못한 짓을 계속하겠는가. 앞으로는 녹미를 봉진하지 말라”고 했다. 영조 51년 8월에 또 ‘사슴꼬리 봉진 금지’가 등장한다. “내가 일찍이 녹미를 즐겼으므로 어영청에서 먼저 구해서 바쳤다. 다른 영문에서도 장차 이와 같이 할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녹미를) 구하지 말라. 하여, 내가 녹미를 구하는 뜻이 없음을 보여주라.” 어영청은 5영문 중 하나다. 어영청에서 시작하면 훈련도감 등 다른 영문들도 따라할 것은 뻔하다.
영조는 10여 년간 계속 ‘녹미 봉진 금지’를 이야기한다. 뒤집어 보면 영조는 사슴꼬리로 만든 음식을 좋아했고 역설적으로 계속 녹미를 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 집권 말기, 여든 살 무렵 영조의 변덕도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사슴꼬리 음식’을 쉽게 만날 수 없으니 얼마나 맛있는 고기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연산군이나 영조 외에도 녹미를 좋아하는 이들은 많았다. 일반인도 녹미를 좋아했고 그 때문에 녹미를 둘러싼 잡음도 많았다.
중종 3년 4월의 기록에는 ‘중신 채윤문이 경상도 수사로 있을 때 녹미, 녹설(鹿舌)을 많이 거두어 장사를 해서 이익을 취했으니, 이렇게 더러운 사람으로 장수를 삼을 수 없다’는 사간원의 탄핵 내용도 있다. 1712년 베이징(北京)에 사신으로 갔던 조선 후기 문인 김창업(1658∼1721)은 베이징에서 “주방에서 사슴꼬리를 들여보냈는데 구웠더니 별로 맛이 없었다. 오래되어 변한 듯하다”고 했다. 귀하지만 일상적으로 먹었던 음식임을 알 수 있다.
황해도 감사였던 율곡 이이도 “녹미는 맛있는 음식이 아니다. 황해도 내에서 사슴이 많이 나지 않으므로 결국 베와 재화를 가지고 한양에서 바꾼다. 그 값도 (원래에 비하여) 지나치게 높다”며 제도를 바꿀 것을 제안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녹미에 대한 관심은 깊었다. 교산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녹미는 전북 부안에서 그늘에 말린 것이 가장 좋고 제주도 것이 그 다음’이라고 밝혔다. 오주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녹미 절임법’을 상세히 설명한다. ‘칼로 사슴꼬리의 뿌리 부분 털을 잘 깎아낸다. 뼈를 발라내고 소금 1전(錢)과 무이(蕪荑) 5푼(반전)을 꼬리 속에 넣는다. 긴 막대에 끼워서 바람 부는 곳에서 말린다.’ 무이는 왕느릅나무(열매)로 추정한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