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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찾은 금관가야 왕릉… “이게 꿈인가” 등골이 오싹

입력 | 2016-03-30 03:00:00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5회>대성동 고분 발굴한 신경철 부산대 교수




신경철 부산대 교수가 21일 경남 김해시 대성동 29호 고분을 복원한 노출전시관에서 발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해=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할배, 여기 옛날 이름이 뭡니까?”

“예전부터 ‘애꾸지’ 아이가.”

1989년 7월 경남 김해시 대성동. 온통 밭이던 야트막한 구릉 일대를 조사한 신경철 당시 경성대 교수(65·현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가 동네 토박이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애꾸지가 혹 ‘애기 구지봉’을 줄여 사투리로 부른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구지봉은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탄생지. ‘그렇다면 애기 구지봉은 그의 후손인 역대 금관가야 왕들의 무덤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이곳은 반경 500m 안에 김해 패총과 고인돌, 대형 옹관묘가 자리 잡고 있어 신경철이 금관가야 왕릉 후보지 중 하나로 올려놓고 있었다. 앞선 실패로 한동안 실의에 빠진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표조사에 들어갔다. 스무 번 넘게 대성동 주변을 드나들면서 토기편들을 손에 쥘 수 있었다.

1990년 8월 경남 김해시 대성동 1호 고분 발굴 직후 신경철 교수(오른쪽)가 현장에서 출토 유물을 소개하고 있다. 신경철 교수 제공

신경철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대학 당국에 찾아가 “사재라도 털겠다”며 발굴 지원을 요청한 것. 앞서 그가 이끈 경성대 박물관 발굴팀은 1987∼1988년 3차에 걸쳐 김해 칠산동 고분을 발굴했지만 부산 복천동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유물들만 건졌다. 가야연맹의 맹주국이던 금관가야의 왕릉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첫 발굴 고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당시 사립대의 열악한 재정 여건상 또 헛물을 켠다면 발굴은 곧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신경철은 1990년 6월 대성동 구릉에서 가장 높고 입지가 좋은 동남쪽 능선 정상부에 삽을 꽂았다. 지표로부터 채 1m도 파지 않은 곳에서 토기편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간에 도굴 갱이 발견돼 잠시 절망했지만, 곧 3m 깊이의 흙구덩이 밑에서 통형동기(筒形銅器·창자루 끝에 꽂는 의례용 청동기)가 나왔다. 일본 고훈시대 수장급 고분에서만 1, 2점씩 들어 있는 통형동기가 8점이나 나온 데다 함께 출토된 금동 마구, 철제 무기, 그릇받침(器臺·기대)의 제작 수준이 매우 높다는 사실에 신경철은 전율했다. 게다가 목곽의 규모는 길이 6m, 폭 2.3m에 달했다. 그는 이곳이 근 20년을 찾아 헤맨 금관가야 왕릉임을 직감했다.

이달 21일 경남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 앞에서 만난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1호분 자리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부산대 사학과 재학 시절부터 방학마다 금관가야 왕릉을 찾으려고 답사를 떠났어요.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금관가야 본거지인 김해에서 왕릉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내 손으로 금관가야 왕릉을 꼭 찾아보고 싶었어요.”

고고학계에서는 흔히 발굴 운(運)이 좋으면 연구 실력이 안 따르고, 연구 실력이 좋으면 반대로 발굴 운이 안 따른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신경철은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고고학자로 통한다. 그는 발굴로 만족하지 않았다. 한발 더 나아가 금관가야 지배층이 부여에서 건너왔다는 파격 주장을 1992년 논문에서 처음 발표했다. 1호분 발굴 이후 4개월 만에 찾아낸 29호분(서기 3세기 말 조성)에서 중국 네이멍구 고원지역의 이름을 딴 ‘오르도스형 청동솥(銅복·동복)’과 도질토기(陶質土器·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회청색 토기), 순장 등 북방계 유목민족의 문화적 속성이 잇달아 발견된 것.

“오르도스형 동복은 중국 동북지방부터 중앙아시아, 이란까지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29호분 동복을 세부적으로 관찰하면 귀의 단면이 볼록한데 이것은 주로 중국 지린(吉林) 성 북부나 헤이룽장(黑龍江) 성 남부에서 발견되는 유형이죠. 바로 부여의 근거지입니다.”

당시 학계 반응은 차가웠다. 북방계 기마민족이 남하해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도달했다는 에가미 나미오 도쿄대 교수의 ‘기마민족설’ 아류가 아니냐는 시각이었다. 이에 대해 신경철은 “에가미 교수와 나의 학설은 이동 루트부터 완전히 다르다”고 반박한다.

현재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동복을 부여계로 단정할 수 없고 △대성동에서 나온 고식 도질토기, 목곽묘와 비슷한 양식이 경주에서도 발견된다는 점 등을 들어 ‘부여 이동설’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의 서기 4세기대 문헌사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금관가야 왕릉인 대성동 고분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다는 게 일치된 견해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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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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