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양적완화’ 뜨거운 논란
여기에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30일 취임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대로 낮출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선거를 앞두고 경기 부양을 위한 정치권과 정부의 추가 기준금리 압박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 한국판 양적완화 논란
이를 두고 전문가들의 의견은 크게 엇갈리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 경제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마이너스 금리 등 비전통적인 통화정책까지 쓰는 일본, 유럽처럼 한은도 선제적이고 과감한 통화정책에 나서야 한다”며 “미국 중앙은행도 민간회사의 주택담보대출증권을 매입해 가계의 이자 상환 부담을 낮췄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찮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장기적으로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 하락) 리스크가 커져 있기 때문에 우리도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쓸 필요가 있다”면서도 “다만 우리는 추가로 금리를 낮출 여력이 있는 만큼 양적완화보다는 금리 측면의 신축적인 통화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기축통화국이 아닌 한국이 선진국처럼 양적완화에 나서면 유동성 과잉 공급으로 인한 물가 상승 압력, 원화가치 급락, 외국인 자본 유출 등의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민간연구소 관계자는 “지금 시중에 돈이 없어서 가계가 소비를 못 하고, 기업이 투자를 못 하는 게 아니다”라며 “유효 수요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과감한 통화정책은 득보다 실이 많다”고 꼬집었다.
무엇보다 통화정책이 정치권의 공약으로 등장하면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사립대 교수는 “정부로서는 중앙은행의 돈을 찍어 푸는 게 가장 쉽겠지만 발권력을 남용하면 중앙은행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경제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새누리당이 제시한 양적완화 정책이 실현될지는 미지수지만 집권 여당의 주요 총선 공약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한은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한은이 실제 채권 매입 등의 양적완화까지 나서지는 않더라도 추가 금리 인하로 여당의 경기 부양 스탠스에 보조를 맞출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주열 총재가 직접 올해 ‘성장률 3%대’ 재진입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당장 기준금리 인하 압박도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개발은행(ADB)도 이날 ‘아시아개발전망’ 보고서에서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3%에서 2.6%로 크게 낮췄다. ADB는 한국 경제가 내년(2.8%)에도 2%대 성장을 이어갈 것으로 내다봤다.
또 다음 달 21일 임기를 시작하는 한은 금융통화위원 4명에 경제 성장을 중요시하는 ‘비둘기파’(통화완화 선호)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면서 금통위 자체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정부와 국책연구원 출신 일색인 금통위원들의 성향을 고려할 때 일각에서는 4월 이후부터 금리 동결 기류가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기획재정부는 사전에 정부와 조율을 거치지 않은 공약이 갑자기 발표되자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다. 총선을 앞두고 여당의 공약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있는 데다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에 간섭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부담 때문이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30일 기자들과 만나 “당(黨)의 공약은 존중하지만, 통화정책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고 밝혔다. 전날 “강봉균 위원장 개인 소신도 있고, 선거 공약으로 한 것 같지는 않다”며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가 한발 뺀 것이다. 유 부총리는 “(새누리당과) 공약을 협의한 것은 없다”며 “선거가 끝나고 공약이 구체화될 때가 되면 통화정책은 당이 통화당국과, 재정정책은 정부와 협의해서 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의 한국판 양적완화 공약의 여파로 금융시장의 국고채 금리는 하락세를 이어갔다. 새누리당이 제시한 산은 채권, 주택금융공사 발행 채권 등 중장기물 채권의 수급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