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96주년]청년이 희망이다 [1부 글로벌 챌린지의 현장]<2>美실리콘밸리 진출한 청년들
트위터 미국 본사에 입사한 김창옥 씨.
동아일보가 지난달 말에 만난 이 3명은 공통점이 있다. 스펙이 화려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영어마저 지독히 못했지만 미국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기업에 취업하거나 인턴이 됐다.
부산 동아대를 졸업한 김 씨가 해외 유학을 준비했을 때 토익 점수는 990점 만점에 315점에 불과했다. 경주대 외식조리학과를 다니는 양 씨는 구체적인 토익 점수를 밝히지 않았지만 “첫 성적이 내 신발 사이즈와 똑같았다”고 했다. 1998년 한국체대 체육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만에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 씨는 당시 영어를 거의 못해 ‘과묵한 청년’으로 불렸다.
출신 대학이나 스펙을 따지기보다 개인의 능력과 의지를 샅샅이 살피는 것이 실리콘밸리의 채용 방식이다. 필답고사에만 능숙한 우등생보다 오히려 학교 성적은 좀 떨어져도 끼와 열정을 가진 학생이 종종 실리콘밸리에서 취업에 성공하는 이유다. 그래서 오늘도 세계 젊은이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실리콘밸리행 비행기를 탄다.
지난달 2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마켓가(街)에 있는 세계적 정보기술(IT) 기업인 트위터 본사. 반팔과 반바지 차림에 노트북PC를 든 김창옥 씨(31)는 최근 실리콘밸리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2012년 트위터에 엔지니어로 입사한 후 지금까지 헤드헌터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이메일을 받았다. 그들은 ‘언제 퇴사할 것인가’ 물으며 더 좋은 기업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실제 트위터를 떠나는 동료도 많다. 남은 이들은 박수 치며 진심으로 축하해 준단다.
미국을 앞마당으로 여기는 겁 없는 젊은이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의 관광 명소인 ‘하프문베이’. 태평양과 접한 절벽 바로 옆에 리츠칼턴 호텔이 들어서 있다. 누구든 한눈에 ‘최고급 호텔’임을 알 수 있다. 지난달 25일 그 호텔에서 동양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러 나온 양아론 씨(26)였다. 주위엔 온통 백인들뿐이어서 양 씨는 쉽게 눈에 띄었다. 그는 지난해 7월부터 1년 동안 이 호텔 주방에서 인턴을 하고 있다.
“고교 때 양식과 일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대학도 외식조리학과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양식을 만들면서 서양에 한 번도 안 가봐도 되나 하는 생각요.”
‘시스코시스템스’ 인턴 권보경 씨 “너무 겸손하지 마세요”
권 씨는 “실리콘밸리의 IT 기업에서 인턴을 하는 기회를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도전정신’인 것 같다”며 “높은 자질을 갖추고도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거나 너무 겸손하면 기회를 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인턴을 마치면 시스코시스템스에 정직원으로 지원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언어연수와 여행을 위해 해외를 자주 오가는 요즘 청년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해외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도 적극적이다. 이 같은 ‘용감성’ 유전자(DNA)가 한국 청년들의 해외 진출을 활성화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인턴’ 경험이 취업의 핵심 무기
트위터에 입사한 지 약 3년 반이 지난 김창옥 씨는 최근 사원을 뽑기 위해 수차례 면접을 봤다. 그는 “한국인 지원자들은 이력서 가장 위에 출신 대학부터 적는다. 하지만 미국 기업은 지원자가 어떤 대학을 졸업했는지보다 필요한 업무능력을 얼마만큼 갖췄는지를 훨씬 중요하게 본다. 그 때문에 미국 지원자들은 출신 대학을 이력서 가장 아래에 적거나 아예 안 적는다”고 말했다.
‘출신 대학이 그 사람의 업무능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 씨는 “토론 면접으로 업무능력을 파악할 수 있다”고 답했다. 예를 들면 ‘동굴에 고드름이 맺혔는데 그 고드름을 모두 다 감쌀 수 있도록 상자를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소프트웨어를 짤지 설명해보라’는 문제를 낸다. 지원자가 그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보면 내공이 드러난단다. 객관식 시험에 익숙한 한국인 지원자는 토론 때 만족스러운 해답을 제시하기가 힘들다.
김 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트위터에 입사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 유학을 하지 않았던 벨라루스와 슬로베니아 출신은 곧바로 채용된 경우가 있다”며 “다른 나라와 달리 유독 한국인만 미국 유학을 한 인재들이 미국 기업에 취업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실무 경험 부족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벨라루스 출신은 대학을 다니며 원격으로 트위터에서 인턴을 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은 대학 시절 트위터가 필요로 하는 기술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수십 차례나 했다. 김 씨는 “트위터가 천재를 뽑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동료를 뽑는다. 인턴 경험이 있으면 훨씬 유리하다”고 말했다.
‘캐피털원’ 산업디자이너 김영교 씨 “현장 경험이 제일 소중”
김 씨는 “한국인 유학생이 미국 현지 학생보다 앞설 수 있는 것은 인턴 등의 현장 경험뿐”이라며 “실리콘밸리 기업에 취업하길 원하는 한국 청년들에게 더 많은 인턴 경험을 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한국 취업준비생들은 어느 정도 준비되기 전까지 인턴 지원을 안 하는 것 같다”며 “준비가 다 됐을 때는 그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배우면서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나가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서도 통하는 ‘한국 스타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세무 전문가로 일하고 있는 이종덕 씨(37). 그는 캘리포니아대 중 하나인 UC데이비스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뒤 샌프란시스코의 세무법인인 로보텀에 취업했다.
하지만 2008년 미국 전문취업비자(H-1B)를 발급받지 못하면서 그는 퇴사해야만 했다. 미국 체류를 연장하기 위해 골든게이트대에서 회계학 석사 과정을 밟았고 미국 공인회계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는 2010년 로보텀에 다시 지원했다. 회사는 기꺼이 그를 받아줬고 H-1B 비자도 받으면서 미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 씨는 로보텀에 재취업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뜻밖에도 ‘한국적인 근무 태도’를 꼽았다. 그는 “입사 초기 밤새 근무하기도 했다. 그저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한 것인데 성실하다는 인상을 주면서 비자 문제가 있었던 나를 회사가 2년 동안이나 기다려줬다”고 말했다.
‘베네핏 코스메틱스’ 본사 홍보담당 이솔 씨 “성실함으로 정면 승부”
샌프란시스코 본사에 온 후 이 씨는 한국인의 경쟁력에 대해 새삼 놀랐다. “대형 이벤트의 경우 한국 미국 프랑스 등 여러 국가에서 동시에 행사를 합니다. 한국 지사는 행사가 끝나면 항상 보고서를 본사에 보냈어요. 그런데 제가 여기서 근무하면서 살펴보니 한국처럼 보고서를 보내는 지사가 하나도 없었어요.” 이 같은 모습을 경험한 베네핏 본사 임직원들은 한국 지사와 이 씨에 대해 ‘성실하다’ ‘꼼꼼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는 사실 자체도 이 씨에게 힘이 됐다. 최근 LVMH의 뷰티 담당 임원이 미국에 와 ‘올해 주목해야 할 글로벌 뷰티 동향’을 발표했는데 그가 1위로 꼽은 것이 ‘K뷰티를 주목하라’는 것이었다. 이 씨는 “그때 일제히 나를 쳐다보던 직원들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의 경쟁력이 이 씨가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만족도 높은 실리콘밸리 기업 분위기
‘마이크로소프트’ 디자이너 김준식 씨 “나를 더욱 발전시킬 것”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는 김준식 씨(31)는 “이곳이 첫 직장이지만 정말 만족하고 있다. 특히 나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김 씨는 “5월에 새너제이에서 디자인 대회가 4일 동안 열리는데 회사가 참가비 1200달러(약 137만 원)를 대 주고 다녀오도록 했다”며 “업무와 관련된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고 하면 거의 허용해 주는 편”이라고 말했다.
김영교 씨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미국 기업의 장점으로 손꼽았다. 캐피털원은 지난해까지 5년 연속 미국 포천지가 선정하는 ‘일하기 좋은 기업 100’에 이름을 올렸다. 김 씨는 “나 같은 신입 직원도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상사에게 이야기할 수 있고 직원들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대부분 경영에 반영된다”며 “상향식 의견 수렴이 한국의 조직보다 미국이 더 잘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 회사에만 있는 특수한 제도도 있다. 자신이 아는 인재를 회사에 추천하는 ‘리퍼(refer)’ 제도다. 김 씨는 “임원급이 아니라 말단 직원들도 인재 추천을 할 수 있다”며 “회사 입장에서는 인재를 찾아내는 데 드는 시간을 줄이고 추천된 사람 역시 면접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실제 추천받은 지원자가 입사하면 회사는 추천한 직원에게 격려금을 지급하기도 한다.
베네핏의 한국 지사와 미국 본사를 모두 경험한 이솔 씨는 양측 근무환경의 뚜렷한 차이를 느꼈다. 그는 “미국 본사에선 주어진 일을 잘 해내는 게 평가 기준이어서 얼마나 오래 근무했는지를 따지지 않아 좋다”고 하면서도 “개인적인 문화가 강해 팀원이 다함께 공동 목표를 향해 가는 느낌이 별로 없다. 때로는 외롭기도 하다”고 말했다.
바뀌는 취업 트렌드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의 취업 트렌드는 계속 바뀌어 왔다. 1939년 컴퓨터 제조업체인 HP가 이 지역에서 창업한 이래 반도체 회사 인텔(1968년), 컴퓨터 회사 애플(1976년) 등 실리콘밸리의 주력은 IT 제조업체였다. 이에 따라 한국인 취업자 역시 하드웨어 엔지니어 위주로 실리콘밸리에 진출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인터넷 붐이 일어난 이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수요가 크게 늘었다. 애플과 같은 제조업체가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방향을 튼 것도 영향을 미쳤다. 2000년부터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근무한 강준 마그나칩 반도체 마케팅매니저는 “2000년대 초반 소위 ‘닷컴 버블’이 붕괴된 이후 오히려 소프트웨어 인력 수요가 더 늘었다”며 “관련 분야를 전공한 한국인 석사 박사라면 미국 기업에서 무조건 채용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한국인 디자인 전공자의 실리콘밸리 진출이 늘고 있다. 아이폰 등 IT 기기가 UX를 중시하면서 디자인을 사업 성패의 주요 요인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IT 기업들도 능력 있는 디자이너 채용에 사활을 걸고 있다. 실리콘밸리 디자이너들 사이에선 “스티브 잡스가 디자이너 연봉을 끌어올렸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이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지역 디자인스쿨에 유학 오는 한국인 학생도 늘어나는 추세다.
새너제이·샌프란시스코=박형준 lovesong@donga.com/에머리빌=박재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