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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으로 뭉친 네트워크”… 한인 청년 파워 커진다

입력 | 2016-04-02 03:00:00

[창간 96주년/토요판 커버스토리]청년이 희망이다
[1부 글로벌 챌린지의 현장]실리콘밸리의 K-드림




지난달 2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정보기술(IT) 업계의 한국계 디자이너 50여 명이 사용자경험(UX) 관련 강의를 듣고 있다. 그동안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인맥은 인도계나 중국계에 비해 크게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최근 크고 작은 한국계 네트워크 강화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지난달 25일 오후 7시.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중심부의 개인 간 거래(P2P) 대출기업 ‘렌딩클럽’ 본사 건물로 20, 30대 한국인 청년 50여 명이 모였다. 미리 준비한 피자로 저녁을 때운 젊은이들 중 6명이 곧바로 발표에 나섰다.

주제는 대부분 미국 정보기술(IT) 기업의 사용자경험(UX) 디자인을 공유하는 내용이었다. “애플리케이션(앱)을 개발할 때 애니메이션 용량을 어떻게 줄일까요” 등 실무적인 질의가 이어진 모임의 참석자는 대부분 실리콘밸리 기업에서 근무하거나 창업에 나선 IT 디자이너들이다.

금요일 저녁 시간까지 써 가며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디자이너들이 한데 모인 이유가 뭘까. 모임을 주최한 렌딩클럽 직원 노영숙 씨(39·여)는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네트워크는 인도나 중국계에 비해 턱없이 약하다”며 “조금이라도 인적 네트워크를 쌓기 위해 6개월에 한 번 모임을 연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에선 사람이 가장 큰 자산

미국에서 창업하거나 취업한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네트워크’를 꼽았다. 한국어로는 ‘인맥’으로 해석되지만 뉘앙스는 많이 다르다.

“사람을 많이 아는 게 실리콘밸리에선 강점이에요. 모두가 비슷한(IT) 직종에 종사하다 보니 전에 함께 일하던 동료, 학창시절 친구가 나중에 어떤 도움을 줄지 몰라요. 자신이 아는 걸 알려 주는 게 실리콘밸리의 문화라 사람이 가장 큰 자산이에요.”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사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에치’ 창업자 문아련 씨(32·여)의 설명이다. 한국식 인맥인 ‘빽’이 아니라 창업에 실질적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바로 실리콘밸리의 네트워크다. 이날 렌딩클럽 모임에는 IT 디자인과 상관없는 직장인 익명 게시판 앱인 ‘블라인드’ 관계자들도 참여했다. 이 회사 미국 지사장인 앨릭스 신 씨(29)는 “유능한 한국인 디자이너를 채용하기 위해 모임에 처음 참여했다”고 말했다. 네트워크의 확장이 곧 사업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한국인의 실리콘밸리 진출 역사가 30년을 맞았지만 한국계 내부의 네트워크 확대는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유대인과 인도인, 중국인 등이 각자 내부의 끈끈한 네트워크로 실리콘밸리의 ‘주류(主流)’로 떠오른 것과는 대조되는 현상이다.

도메인 등록업체인 고대디(godaddy)에 근무하는 하대웅 씨는 “재미 한인 1세대는 한국 출신이라 한국 문화에서 부정적 인상을 풍기는 인맥 쌓기를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 같은 성향 때문에 내부적으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인도나 중국인에 비해 창업기업 수도 적다”고 분석했다.

한국인들은 실리콘밸리 곳곳에서 매일 밤 열리는 네트워크 모임인 ‘미트업(meet up)’ 참석에도 소극적인 편이다. 한 실리콘밸리 창업자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도 실리콘밸리 네트워크를 형성하지 못해 결국 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철수하는 스타트업도 많다”고 전했다.



네트워크 강화에 나서는 실리콘밸리 한국인


이 같은 상황이 문제라는 인식이 퍼지며 최근에는 한국계 네트워크 모임도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실리콘밸리 내 한국인 전문가 모임인 ‘베이 에어리어 K그룹’(이하 K그룹)이다.

이곳은 2007년 초기 멤버 20명으로 시작했다. 실리콘밸리 지역의 과학, 공학 분야 종사자들이 인도계와 중국계 못지않은 네트워크 구축을 목표로 만들었다. 모임의 취지에 공감하는 한국인이 늘면서 지금은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공학자는 물론이고 경영학 관련자, IT 디자이너 등의 소그룹이 여럿이다. 회원도 3700명으로 늘어났다.

강준 K그룹 회장은 “실리콘밸리 자체가 자신이 가진 네트워크를 핵심 자산으로 삼아 작동하는 곳”이라며 “모임 참석자끼리 교류를 통해 하고 있는 일에 영감을 받거나 공동 창업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을 매개로 만들어진 한국계 실리콘밸리 창업 기업은 20여 곳에 이른다.

한국인들이 좀처럼 진출하지 못했던 창업자를 위한 벤처캐피털(VC) 분야에도 속속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빅베이슨캐피탈’ 창업자 윤필구 대표(42)다. 그는 미국 대형 VC에서 근무하다 2013년 직접 VC를 차렸다.

윤 대표는 지난달 2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호 펀드로 150억 원을 모았는데 한국 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계획이다. 회사 경영이념에도 ‘한국 기업 중심으로 투자한다’고 못 박았다”고 말했다. 그가 투자하는 13개 기업 중 한국 회사가 8곳이다.

실리콘밸리에서 VC가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수십 년 됐지만 한국계 VC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알토스벤처스, 트랜스링크캐피털, KTB벤처스, 스톰벤처스, 매버릭캐피털 등이 한국인이 이끄는 실리콘밸리 VC다.

일부 한국계 VC는 한국 법인을 운영하기도 한다. 한국 현지에서 유망한 기업을 직접 발굴하겠다는 의미다. 윤 대표는 “내가 1차로 한국 회사에 투자한 뒤 그 회사의 주주 구성, 회사 시스템 등을 선진적으로 바꾸는 것이 목표”라며 “이를 통해 다른 실리콘밸리 VC로부터 후속 투자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새너제이=박재명 jmpark@donga.com·박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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