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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이슈]딸의 유서처럼… 피해자 가족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입력 | 2016-04-02 03:00:00

‘학교폭력’에 중2 딸 잃고… 그후 엄마의 5년




《지난해 교육부가 발표한 전국 초중고교의 2014년 학교폭력 심의 건수는 1만9500여 건. 2013년 1만 7749건보다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학교 안팎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폭력이 여전히 심각한 것으로 진단한다. 학교폭력으로 자살한 딸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5년째 법정에 나오는 한 부모, 그리고 현재 한 중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교폭력 처리 과정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학교폭력 이슈가 한창 주목을 받던 2012년 11월 홍익교원연합 소속 교사들이 학생들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을 전달하고 자성하는 의미로 무릎을 꿇었다. 이날 이들은 숨진 학생들을 애도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짐했지만 지금도 학교폭력은 끊이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DB

다시 엄마로 태어난다면 꼭 가해 학생의 엄마로 태어나고 싶다. 그래야 그들처럼 내 자식의 체온을 느끼고 학교의 관심과 위로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깐.

2011년 11월 중학교 2학년이던 내 딸 미선이(가명·당시 14세)는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해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내 편은 아무도 없다”고 적힌 유서에는 자신을 괴롭힌 같은 반 학생 6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난 피해자의 엄마가 됐다.

학기 초부터 같은 반 ‘일진’ 남학생들은 툭하면 딸을 때렸다. 이유는 없었다. 4월 25일, 학교를 다녀온 딸은 현관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딸의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얼굴은 벌겋게 부어 있었다.

다음 날 교장실을 찾아가 피해 사실을 알렸다. 그 자리에는 교감, 담임도 있었다. 딸이 고자질장이로 찍히면 보복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선생님’들을 믿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후 3차례 더 담임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그때마다 담임은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가해 학생 부모들에게 ‘제발 그만 때리게 해 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학교와 담임은 아무 응답이 없었다. 딸은 온몸에 선명히 멍이 남을 정도로 맞았지만 그들은 장난으로 여겼다. 나중에 알았지만 담임은 가해 학생을 불러 “사이좋게 지내라”고 훈계한 게 전부였다.

그날, 딸은 아침을 걸렀다. 같은 반 학생들이 전날 체육시간에 공이 없어진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몰아세우며 사과를 강요했다고 억울해했다. 출근을 미룬 남편은 딸을 달랬다. 곧 기말고사만 끝나면 학년이 바뀌니 조금만 더 참자고. 학교에서 돌아온 딸은 혼자 있고 싶다고 했다. 잠깐 외출한 사이 딸의 전화가 왔다. 평소와 달리 “언제 오냐”고 보챘다. 그게 딸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학원에 간 줄 알았던 딸은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과 함께 딸을 찾아 나섰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경찰은 딸의 인상착의를 되물었다. 딸이 입고 나간 옷, 신발, 머리 모양…. 경찰은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날은 나와 남편의 결혼기념일 이틀 전이었다.

“우리 딸 곧 올 거야.” 딸의 장례식장을 찾은 지인들은 부조금을 건넸지만 받지 않았다. 지독한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부조금을 받으면 이 악몽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빨리 일어나서 우리 딸 간식 챙겨줘야 하는데.

가해 학생, 아니 그 부모라도 만나 진심어린 사과를 듣고자 했다. 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사과는 없었다. 한 가해 학생 부모는 남편의 회사로 전화해 “칼로 찔러 죽이겠다”고 했다. 담임은 경찰 수사를 받자 오히려 억울해했다. “아이가 죽을 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가 신입니까.” 딸의 장례식 1주일 만에 전화를 건 담임의 말이었다.

학교는 책임을 피하는 데 급급했다. 교장실에서 만난 교장과 교감 담임은 입을 맞춘 듯 똑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검찰이 학교를 뒤졌지만 불리한 증거는 모두 폐기된 뒤였다. 교원단체는 경찰과 검찰 수사를 교권 탄압이라고 비난했다. 교원단체 회장은 검찰청과 경찰청을 찾아 항의했다. 난 담당 검사 만나기도 어려웠는데 그들에겐 아무 일도 아니었다.

교원단체를 등에 업은 학교는 무서울 게 없어 보였다. 교감은 한 방송사 인터뷰에서 “자기 자식이 죽었는데 왜 학교 탓을 하느냐”고 소리쳤다. 있지도 않은 가정불화를 꺼냈다. 친인척 중에 검찰 고위직이 있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우리는 졸지에 교권 탄압의 장본인으로 몰렸다. 언론은 진실 공방이라고 썼다. “딸도 이렇게 힘들었구나.” 우리 가족은 딸이 당했던 것처럼 또다시 ‘외톨이’가 됐다.

법정은 또 다른 ‘교실’이었다. 교육청과 학교에서 나온 사람들은 가해 학생 쪽 방청석에 앉았다. 가해 학생 부모들은 우리에게 눈총을 줬다. 변호사는 나를 증인석에 앉히고 있지도 않은 가정불화를 물었다. 검사는 가만히 있었다. 변호사와 날선 공방을 주고받는 검사는 영화 속 얘기였다. 주말이면 온 가족이 조조영화를 보고 외식을 하던 단란했던 가정은 법정에서 무참히 짓밟혔다.

모두 침묵했다. 가해 학생에 대한 재판은 2012년 10월 시작됐지만 담임은 바쁘다는 이유로 증인 출석을 미루다가 5월 말에야 증인석에 앉았다. 같은 반 친구들도 말을 아꼈다. “우리 애가 아직 학교 다니잖아.” 친분이 있던 한 엄마가 에둘러 말했다. ‘그래, 자녀의 앞날이 더 중요하니깐. 좋은 고등학교에 가고 좋은 대학에 가려면 학교 눈 밖에 나지 않아야 하니깐….’ 같은 엄마로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5월 우리 가족은 한국을 떠났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은 누나의 죽음을 감당하기에 너무 어렸다. 아들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협박까지 당한 걸 알게 된 아들은 지금도 남편이 집에 오기 전에 잠을 자지 않는다.

세 식구는 서로 다른 상처를 안고 있다. 행여 그 상처를 건드릴까 한숨조차 조심스러웠다. 점점 누나를 닮아가는 아들을 보고 “누나랑 닮았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한국에 있는 부모 형제들과는 문자로 안부를 물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숨길 자신이 없었다. 가족 목소리를 들으면 겨우 추스른 마음이 다시 무너질 것 같았다.

“누구야.” 지갑 속 딸 사진을 본 지인이 물었다. 간신히 울음을 삼키고 “조카”라고 둘러댔다. 난 이곳에서 외아들을 둔 엄마로 지낸다. 한국에서는 딸의 옷을 입고 딸의 지갑을 들고 딸의 손목시계를 차고 다녔지만 여기서는 서랍 속에 넣어둬야 했다. 재판이 열릴 때만 조용히 한국을 다녀왔다. 누군가 한국에 간 이유를 묻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사이 가해 학생들은 대학생이 됐고 교감과 담임은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너도 힘들잖아.” 주변에서는 이제 그만하라고 했다. 하지만 난 딸처럼 학교의 무관심으로 죽은 아이들의 뉴스를 보는 게 더 힘들었다. 그때 내가 학교의 잘못을 확실히 묻지 못해 아이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내 아이가 학교폭력을 당하면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는지, 담임과 학교 교육청은 침묵했지만 법원은 답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학교를 믿었다가 자식을 잃은 부모는 내가 마지막이길 바라면서.


○ 에필로그

2013년 3월 15일 서울남부지법 404호실, 난 이곳에서 미선이 엄마를 처음 만났다. 당시 수습기자였던 나는 ‘서울 양천구 S중학교 학교폭력 사건’의 가해 학생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법원을 찾았다. 워낙 떠들썩했던 사건이라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싶었을 뿐, 취재가 목적은 아니었다.

미선이 엄마는 딸의 영정사진을 품에 안고 방청석에 앉아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지쳐보였다. 난 그 뒤에 앉았다. 재판은 10분 만에 끝났다. 증인인 담임이 나오지 않아서였다. 판사, 가해 학생, 변호사가 차례로 법정을 나섰지만 엄마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엄마는 내게 어릴 적 딸의 사진을 보여줬다. “너무 예쁜 딸이었다”고 말하는 엄마의 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가득했다.

그 슬픔의 이유가 궁금했다. 과거 기사를 찾아봤다. 미선이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가해학생과 담임은 경찰과 검찰 수사를 받았다. 학교가 ‘유족이 거짓을 말한다’고 주장하면서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 딱 거기까지였다. 미선이의 죽음의 누구의 잘못이었는지, 진실을 무엇인지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취재였다.

미선이를 괴롭힌 가해 학생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14살, 아직 철이 없으니깐. 그럴 수도 있다고 백번 양보하더라도 어른들은 달라야 했다. 하지만 어른들이 더했다. 가해 학생 부모는 제 자식을 감싸기에 급급했고 담임과 학교는 그들의 편에 섰다. 사사건건 대립하던 양대 교원단체는 교권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학교를 두둔했다. 관할 교육청은 뒷짐만 지고 있었다. 거기에 ‘선생님’은 없었다. 미선이 엄마는 딸을 괴롭힌 가해학생보다 자기 안위를 지키려고 최소한의 도리마저 저버리는 뻔뻔한 어른들의 행태에 더 분노했다.

4년 전 쫓기듯 한국을 떠난 미선이 가족과 달리 그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해 학생 7명 중 5명은 괴롭힘의 정도가 심하지 않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지 않았다. 괴롭힘을 주도한 2명만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이들이 재범을 저지르지 않도록 상담교육을 받도록 명령했다.

교감은 여전히 학교에 있다. 담임도 여전히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담임이 지금까지 받은 처분은 관할 교육청의 징계뿐. 2012년 검찰은 사건 직후 담임의 직무 유기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가 미선이 가족의 요청에 따라 재수사를 했다. 2014년 담임은 뒤늦게 재판에 넘겨졌다. 1심 법원은 유죄 판결을 내렸지만 2심에서는 무죄가 나왔다. 담임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은 맞지만 그 의무를 고의적으로 포기했다는 증거가 있어야만 죄를 물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법이 그랬다.

미선이 엄마는 대법원의 판결만 기다리고 있다. 결코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게 아니라고 했다. 엄마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상처는 결코 치유될 수 없다며 가슴을 쳤다. 다만 학교 안에서 학생을 보호하고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것이 학교와 선생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호경 기자 whalefish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