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라 바야데르’ 출연해 보니
무대 위에서 지켜본 무대
오디션을 본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단장)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국립발레단의 올해 첫 작품 ‘라 바야데르’에 기자의 출연이 확정된 순간이었다.
‘라 바야데르’는 발레 작품 중에서도 많은 인원이 무대에 오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에도 111명이 무대에 올랐다. 출연자 중 전문적인 무용이 필요 없는 역할은 딱 4명. 2막에 등장하는 가마꾼 겸 창지기. 보통 무용수 출신인 발레단 사무직원들이 그 역할을 맡아 왔다.
맡은 일은 간단했다. 2막이 시작되면 다른 가마꾼과 함께 두 차례 가마를 들고 무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가면 된다. 이어 창을 든 창지기로 무대 가장 뒤쪽의 왼편(관객 기준)에서 40분간 ‘정말 가만히’ 서 있으면 된다. 2막이 끝나기 전 뒤로 돌아서는 ‘아주 간단한’ 동작이 포함돼 있다.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 공연에서 창을 들고 서 있는 김동욱 기자(가운데). 수석무용수 김지영은 “서 있는 역할이 무용수보다 더 힘들 수 있다”고 말했다. 40분간 미동 없이 서 있은 뒤 종아리와 발바닥에 경련이 오기도 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두 번째 무대 리허설은 전날보다 나았지만 40분간 ‘가만히’ 서 있는 것은 고역이었다. 함께 창지기로 나선 발레단 직원이 말했다. “관객이 우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게 잘하는 거예요.” 긴장된 다리 근육 탓에 몇 차례 휘청거릴 뻔했다. 공연이 끝날 때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려고 했다. 2막이 끝나고 신무섭 부예술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눈에 띄지 않았어요.”
지난달 30일 첫 실전엔 2000여 명의 관객이 가득 찼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선 것은 처음이었다. 무대는 물론이고 객석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 있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40분간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뒤 강 감독이 안아주며 말했다. “이 정도면 합격점이네요.” 눈물이 날 뻔했다.
무대 위에선 관객석에선 체험할 수 없는 가쁜 숨소리와 땀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수석무용수 이동훈은 “객석에선 예쁜 표정과 몸짓의 무용수만 보이지만 무대에서 퇴장하면 힘들어 쓰러지는 무용수도 많다”고 말했다.
첫날 공연의 주역인 수석무용수 이은원은 3막 솔로 무대를 마친 뒤 가쁜 숨을 쉬며 들어왔다. “아쉬워요. 며칠 전 발목을 다쳐 힘이 들어가지 않았어요.”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아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무용수 뒤로 터지는 박수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PS: 오자현 공연기획팀장이 공연을 끝낸 뒤 “집에 가면 허탈감을 느낄 것이다”고 말했다. 단역일 뿐인데 그럴까 싶었다. 며칠 뒤 그 ‘허탈감’이 찾아왔다. 무대의 매력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