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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 있어야 기회 잡아… 유리천장 깬 비결은 노력과 진정성”

입력 | 2016-04-04 03:00:00

‘女검사장 1호’ 조희진 의정부지검장-女검사 20명 워크숍




조희진 의정부지검장이 1일 관내 여검사 20명을 위해 마련한 ‘여검사 워크숍’ 시작에 앞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권선주 기업은행장은 조 지검장과 함께 2013년 12월 각각 여성 최초 은행장, 검사장에 영전한 인연으로 강사로 나섰다. 의정부지검 제공

“자아를 찾고 실력을 키우세요. 여자라고 일을 포기할 필요는 없답니다.”

1일 저녁 경기 의정부시의 한 식당. 한국 최초의 여성 은행장인 권선주 기업은행장(60)이 여검사 20여 명 앞에 섰다. 검사복이 아닌 편한 차림의 여검사들 사이에서 ‘첫 여성 검사장’ 조희진 의정부지검장(54·사법연수원 19기)이 권 행장을 반갑게 맞았다.

전체 검사 47명 중 20명이 여성인 의정부지검은 소속 여검사들의 역량 강화와 비전 공유를 위해 1박 2일간의 워크숍을 열었다. ‘남초’ 조직인 검찰에서 롤모델이 부족한 여성 후배들을 위해 조 검사장이 마련한 ‘힐링 캠프’다. 3년 전 같은 날 각각 ‘여성 1호’ 은행장과 검사장에 임명된 두 사람은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듯’ 삶의 노하우를 풀어냈다.

○ “노력과 진정성으로 부순 유리천장”

1978년 입행한 권 행장은 38년간 직장 일과 가사를 병행할 수 있었던 비결로 ‘노력’과 ‘진정성’을 꼽았다. 여성에게 연수 기회가 주어지지 않던 시절 ‘통신 연수’에서 더 들을 과목이 없을 만큼 수강했고 산후조리 때를 빼면 휴일에 낮잠을 자 본 기억이 없었다. 권 행장은 “남성은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라며 “성 대결이란 생각을 버리고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을 능력을 키우라”고 당부했다. 권 행장은 남 얘기 잘하는 여성들을 꼬집으며 “경청하되 말을 옮기지 않아야 신뢰의 중심에 선다”고 강조했다.

가족에게 소홀해 고민하는 검사들에겐 “아이에게 중요한 건 부모가 무엇을 해 주느냐가 아니라 어떤 모습을 보여 주느냐다.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위로했다. 결혼을 앞둔 검사들에겐 “아내 엄마 며느리 등 모든 역할에 두려워 말고 도전하라”고 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말을 인용해 “모든 것에 완벽한 어머니는 허상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변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하라”고 조언했다.

권 행장은 25년간 영업점을 돌며 현장에서 쌓은 인연이 본점 근무보다 값진 경험이었다고 밝혔다. “매일 다른 고객들에게 성공과 실패 일체를 배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직장 생활이 지루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 살아 있는 롤모델과 ‘힐링 수다’

27년 차 현역 여성 검사 최고참인 조 검사장은 ‘밥 짓는 시간도 분단위로 계산해 밀린 일을 했다’는 권 행장의 말에 자신은 그렇게 하다 여러 번 냄비를 태워 먹었다며 후배들 앞에서 스스로 권위를 내려놨다. 바쁜 후배들을 대신해 행사 준비를 도맡은 황은영 부장검사(50·26기)도 시종 자리를 옮겨 다니며 후배들을 섬겼다.

숙소로 옮겨 진행된 ‘무한 토크’는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친정 자매들이 모인 것처럼 편안한 분위기에서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한 어려움, 가사도우미 때문에 속상했던 얘기 등으로 수다 꽃을 피웠다. 인기 드라마 주인공인 탤런트 송중기 얘기가 나오자 나이,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환호를 질렀다.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예비신부 검사는 “일 때문에 딸 노릇도 제대로 못 해 앞으로 아내 며느리 역할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정말 힐링이 됐다”고 말했다. 둘째 출산을 앞둔 만삭의 여검사는 “애 하나도 버거워 둘은 어떻게 낳고 살지 고민이었는데 잘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2001년 전체 여검사가 지금의 10분의 1인 50명일 때 임관한 임은정 검사(42·30기)는 “후배들의 밑거름이 된 ‘여성 1호’ 선배들처럼 오늘 우리가 견디는 하루가 후배들에게는 또 다른 내일이 될 것”이라며 이육사의 ‘광야’ 한 구절을 낭독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후배들을 바라보는 조 검사장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