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 대선 유력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지난달 21일 워싱턴포스트를 방문해 논설위원들과 집단 인터뷰를 했다. 오른쪽은 프레드 하이엇 WP 논설실장. 사진 캡처 워싱턴포스트
최영해 국제부장
트럼프가 돈을 밝히는 이유는 미국이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9조 달러(약 2경1850조 원)나 되는 나랏빚에 골골거리는 나라가 세계의 경찰국가로 자처하는 게 바보 같은 생각이란다. 일자리도 중국 일본 멕시코 한국에 다 빼앗겼으니 미국에 돈 안 되는 것은 협약이든 계약이든 무엇이든 죄다 다시 테이블에 올리겠다고 했다. 신뢰나 가치, 유대 같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은 트럼프의 연설이나 인터뷰 어디를 뒤져도 찾을 수 없다. 공공 외교나 스마트 외교라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 정책은 처음부터 그의 관심 밖이었다.
인터뷰 곳곳에 팩트 오류가 있고, 앞뒤 말이 상충되고, 과격한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외교 정책도 오로지 돈이 되느냐, 아니냐를 놓고 따지는 트럼프의 천민자본주의, 화폐 만능주의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강한 중국을 만드는 돈을 미국에서 빼내 갔고, 환율을 기가 막히게 조작해 떼돈을 벌어 이제 미국을 군사력으로 위협하고 있다고 소리치면 유세장은 박수의 도가니가 된다.
그제 위스콘신 주 로스차일드 선거 유세에선 “북한이 한국이나 일본과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들이 하는 것”이라며 “행운을 빈다”라고 남의 집 불구경하듯 말했다. 아시아에서의 전략적 균형이라는 미국의 국방 정책은 그저 사치스러운 레토릭에 불과할 뿐이다. 트럼프가 미국에 바가지를 씌운다고 꼽은 나라가 중국 일본 한국 중동 등이다. 그가 집권하면 한국에 얼마나 많은 청구서를 들이밀지 아찔하다. WP는 인터뷰가 끝난 뒤 “본인은 극단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에 극단적인 리스크(radical risk)가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후기를 적었다. 또 트럼프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팩트와 증거를 무시한다고 지적했다. NYT는 사설 제목으로 ‘트럼프의 외교 정책에 관한 위험한 횡설수설(babble)’이라고 달았다. WP와 NYT가 모두 F학점을 줬지만 나는 트럼프 인터뷰를 읽으면 읽을수록 어디로 튈지 모를 ‘트럼프 공화국’에 숨이 막혔다.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가 ‘좀비 후보’가 되는 것을 겁내면서도 트럼프 돌풍을 멈추게 할 묘책을 못 찾아 전전긍긍한다. 미 공영방송 NPR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침묵하는 다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강요하는 문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도했다.
트럼프는 자신이 고립주의자(isolationist)가 아니라 ‘미국 우선(America First)주의자’라고 치장했지만 NYT는 이를 위해 다른 나라는 뼈 빠지게 미국의 뒷감당을 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옛날에 아무리 좋은 친구였어도 지금 포켓에서 돈을 안 꺼내면, 바로 전쟁터에 걸어 들어오지 않으면, 이젠 우리 친구 하지 말자는 거다.
지난주에 만난 주한 일본대사관의 한 고위 외교관은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돼도 트럼프의 말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황당한 트럼프 말에 많은 미국인의 생각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트럼프 시대에 대비하기 시작했다고 귀띔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 대선이 치러지는 11월 8일 이후엔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든지 미국은 지금과는 분명 다른 나라가 돼 있을 것이다. 우리는 “트럼프가 과연 힐러리를 이길 수나 있겠느냐”라는 생각에 마냥 팔짱만 끼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트럼프의 말이 보통 미국 사람들의 생각이라면, 그게 미국의 시대정신에 조금이라도 가깝다면, 정말이지 보통 큰일이 아니다.
최영해 국제부장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