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대부 무덤 이야기’ 펴낸 김우림 전 울산박물관장
2002년 경기 파주시 교하읍에서 파평 윤씨 모자 미라를 발굴하고 있는 김우림 전 울산박물관장. 김우림 전 울산박물관장 제공
조선 묘제 전문가인 김우림 전 울산박물관장(55)이 최근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 이야기’(민속원)를 펴냈다.
김 전 관장은 고려대박물관 학예사 출신으로 2002년 국내 최초의 모자(母子) 미라였던 파평 윤씨 미라 발굴과 후속 연구를 주도했다. 2004∼2009년 서울역사박물관장을 지낸 뒤 2014년까지 울산박물관장으로 일했다.
그는 조선 사대부 무덤 양식이 전기에는 ‘회격묘’, 후기의 ‘회곽묘’로 달랐다는 것을 처음 밝혀냈다. 회격묘는 땅을 파고 먼저 목곽·목관을 안치한 뒤에 땅과 목곽 사이를 삼물(三物·회, 마사토, 가는 모래를 섞은 것)로 채웠다. 후기에는 삼물로 회곽을 먼저 만들고 목관을 나중에 안치했다. 김 전 관장은 “임진왜란 이후 성곽 등을 복구하느라 회가 부족해지자 회가 덜 들어가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라고 설명했다.
묘비를 비롯한 석물 양식도 크게 변화했다. 조선 초기엔 불교의 연화화생(蓮花化生·무덤 주인이 불교의 정토에서 태어나길 소망하는 것) 사상을 반영해 비석 상부에 연잎, 하부에 연꽃을 새겼다. 김 전 관장은 “이는 중국에도 없었고 조선 초기 200년간의 무덤에서만 보인다”고 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조상의 업적을 적은 비문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중요해지면서 지붕 모양의 옥개석을 얹는 것이 일반화돼 현대까지 이어졌다.
그는 기존 학설의 오류도 지적했다.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워 묘역을 밝히는 석물)은 종1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만 세울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조사 결과 정3품 이상이면 세울 수 있었다. 책은 또 왕릉 발굴 보고서의 서술 오류, 분묘 출토 미라의 생성 메커니즘 등도 소개했다.
김 전 관장은 ‘남들이 안 하는 조선 묘제 연구를 해 보라’는 대학 은사의 권유에 따라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30여 기의 무덤을 발굴해 보고서를 냈고, 재개발과 문중의 이장 사업 등으로 파묘하는 무덤 수천 기를 조사했다. 그는 “묘제에 관한 문헌 기록이 별로 없다”며 “잘못된 주장이 최근의 연구 결과를 반영하지 않고 인터넷은 물론 학계에서도 그대로 반복되는 점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