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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양(遼陽)이 고구려의 평양? 中요동 고구려계 고분벽화 국내 공개

입력 | 2016-04-08 08:00:00


삼족오. 중국 원태자 벽화묘 그림

“앗, 삼족오다!”

“곰도 보이네.”

3월 중순 인하대 6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4~5세기 동북아시아 고구려계 벽화고분 이해를 위한 한중일 국제학술회의’ 현장에서 나지막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둥그런 태양 안에 긴 꼬리와 세발 달린 삼족오의 모습이 들어 있는 ‘태양도(太陽圖)’와 검은 곰이 두 앞발을 번쩍 들어 몸을 곧추세우고 있는 ‘흑웅도(黑熊圖)’ 벽화를 보고서였다. 중국 랴오닝(遼寧) 성 차오양(朝陽) 지구 원태자(袁台子)촌 벽화묘에서 발견된 것들이었다. 50여 명의 청중은 슬라이드로 보여주는 벽화들을 연신 카메라로 찍어댔다. 직감적으로 우리 문화와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실제로 태양 안의 삼족오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문화 상징으로 꼽힌다. 각저총, 오회분 4호묘, 덕화리 1, 2호분 등 고구려 벽화 무덤에서는 삼족오가 등장한다. 검은 곰 역시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 건국 신화의 곰과 호랑이를 연상시킨다. 그 전에 랴오닝 성 핑강(平岡)지구 유적에서는 삼족오 아래에 곰과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 금동장식이 출토돼 한국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슬라이드로 벽화 그림을 소개하는 중국 요령성 문물고고연구소의 고분 전문가 이용빈(李龍彬) 부소장은 원태자촌 벽화묘를 전연(前燕)시대의 묘이며 선비족의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문화는 중원 지역의 한문화(漢文化)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그의 설명에는 ‘고구려’라는 단어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준비해온 100여 장의 벽화 슬라이드를 빠른 속도로 넘겨 갔다. 국내에서는 한번도 소개된 적이 없는 벽화 자료들도 여러 장 있었다. 슬라이드 자료를 마구 찍어대는 청중들의 카메라 세례에 당황했던지 그는 서둘러 강연을 마쳤다.

수렵도. 중국 원태자 벽화묘에 새겨진 사냥하는 장면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가 주관한 이날 대회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고분 벽화 연구 전문가 10여 명이 참가한 최초의 국제대회다. 중국 동북 랴오닝 성과 한반도, 일본 규슈 지역에 분포한 벽화고분의 역사와 해석, 벽화고분의 전파 경로 등을 발표하는 자리로 일본과 중국에서 8명의 연구자들을 초청했다. 행사 진행을 맡은 인하대 복기대 교수(융합고고학)는 “한국학계 주도로 중국, 한반도, 일본에 분포하고 있는 석실 벽화 고분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논의해 보는 자리다. 이 주제를 놓고 3국 학자들이 처음 만나는 회의이니만큼 이를 시발점으로 고구려계 벽화고분 연구가 고대사 문화교류 연구에 중심축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중국 랴오둥(遼東)의 랴오양(遼陽), 차오양 등 지역에서 대거 발굴되고 있는 고분 벽화들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모아졌다. ‘고구려 고분연구의 새로운 제언’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염정하 연구교수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고구려 고분 벽화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5세기 중엽 이후에 만든 중국 랴오닝 성 일대의 고분들에 대해 심도 있게 살펴봐야 한다”고 밝혔다. 염 교수는 문헌기록에서 나타나는 고구려 중심부의 위치 변화와 벽화 고분 내용을 비교해본 결과 고구려의 고도(古都) 지안(集安) 지역과 랴오양 지역의 고분 벽화는 연결 구도가 뚜렷한 반면, 중국 중원지역과는 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염 교수는 몇 가지 근거를 들었다. 첫째, 고구려와 중국 랴오양 지역에서 나타나는 석실봉토 벽화분은 중국 중원에서 발견되지 않는 무덤 양식이라는 것. 중국 황하 유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무덤 양식은 전실화상석 무덤으로 고구려와 중국 랴오양 지역의 석실봉토 무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현재 랴오양 지역에서 발견된 석실봉토 고분은 25기 정도. 앞서 중국인 학자가 보여준 벽화그림 상당수가 북원(北園) 1, 3호묘, 상왕가촌묘(上王家村墓), 봉대자(棒臺子) 1호묘, 삼도호(三道壕) 1호묘, 남교가(南郊街) 벽화묘 등 석실봉토 양식 무덤에서 나온 것들이다.

한중일 삼국의 고분벽화 전문가들이 참가한 국제 학술대회.


둘째, 고구려의 요동성총과 랴오양 벽화고분에서는 구조상 유사점이 있으며, 묘주(墓主)의 생활상과 천상 세계 묘사 등 벽화에서도 공통점이 많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중국과 한국의 사료를 살펴볼 때 4~6세기 중국 랴오양 지역은 고구려를 비롯한 한민족계의 영역으로 추정된다는 것. 즉 중국 랴오닝 성 일대의 벽화는 중국이 아니라 고구려와 관련이 깊다는 주장이다.

“여러 면에서 고찰해볼 때 중국 랴오양 지역과 황화 유역은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학계나 일본학계가 랴오양 지역의 벽화 무덤을 모두 중국계인 한-위·진 시대의 벽화로 인식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구려사에 대한 이해 부족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동안 일본학계 주도로 진행한 고구려계 벽화고분 연구가 기존 문헌기록과 맞지 않는 등 많 은 문제점을 보였다. 대표적으로 현재 북한의 평양 지역에 나타나는 벽화고분 연대와 내용은 중국 한나라계와는 큰 관련이 없으며, 이 지역의 벽화 양식 또한 지안 지역과도 차이가 나고 있다. 평양 지역을 지배한 권력 주체에 대해서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발표중인 염정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 


염 교수의 이 발언은 기존 학계의 한사군 평양설, 고구려의 대동강 평양 도읍설과 정면으로 배치돼 논란이 예상된다. 이는 최근 들어 제기되고 있는 고구려의 랴오양 도읍설을 뒷받침한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기에 평양으로 도읍을 이전했는데, 그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중국 랴오둥 지역의 랴오양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역풍도 만만찮다. 최근 이른바 ‘주류’ 역사학계는 지난달 말 출간된 계간지 ‘역사비평(봄호)’에서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이라는 주제로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한사군 평양설을 부정하거나 고구려 신(新) 평양설 등을 내세우는 주장을 ‘사이비 역사학’이라고 비판한 것.

과연 주류 역사학계가 내세운 설에 배치되는 주장이 역사적 파시즘에 근거한 사이비인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중국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복기대 교수는 “중국 측이 랴오둥 지역에서 발굴을 해 놓고도 파장을 우려해 감춰 놓은 벽화들이 상당수 있다”고 귀띔했다. 염 교수의 주장은 앞으로 엄중한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다만, 한마디로 배척하기보다는 학술적으로 검증할 가치는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