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중국을 광기로 들끓게 한 문화대혁명은 이렇게 시작됐다. 수천만 명의 아사(餓死)를 부른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 때문에 비판받으며 뒷전으로 밀려 있던 마오쩌둥은 문혁을 통해 권력을 회복했다. 공산당 내 반대파와 지식인, 지주 등 수백만 명이 홍위병들에게 끌려다니며 모욕, 구타를 당하고 목숨을 잃거나 구금됐다. 중국의 농업, 공업 생산은 급감했다. 훗날 중국의 개혁, 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 현재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도 지방으로 쫓겨났다.
문혁이 발발 50주년을 맞았다. 마오쩌둥이 타계한 1976년까지 10년간 지속된 문혁은 중국 현대사의 암흑기다. 이 사건은 나비효과처럼 한국 경제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바로 세계사에서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고속성장이었다. 진념 전 경제부총리는 마오쩌둥을 한국 경제발전의 최고 공신 중 하나로 꼽는다. “마오쩌둥이 문혁으로 중국의 개혁, 개방을 늦추지 않았으면 한국은 경제성장의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이란 설명이다.
문혁 후 재집권한 덩샤오핑 등은 조금씩 경제개혁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속성장의 궤도에 올라탄 한국은 빠르게 달아났다. 1980년대에 우리 경제는 연평균 10%씩 성장했다. 1990년대 초 중국의 본격 개방은 한국에 또 한 번의 기회가 됐다. 기술 격차를 벌린 상태에서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른 중국이 한국산 부품, 중간재의 최대 수출국이 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경제규모 세계 2위에 올라선 2010년 이후 분위기가 급변했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중국은 기술 격차를 바짝 좁혔고,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금방이라도 한국을 추월할 기세다. 올해 3월 세계 선박 수주량의 69%를 중국이 싹쓸이할 때 세계 1위를 자랑하던 한국의 조선업계는 6% 수주하는 데 그쳤다.
어쩌면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한 한국 경제는 ‘중국의 지체(遲滯)’란 특수 조건이 만든 우연의 산물일 수 있다. 문제는 중국이 경제에 눈뜨기 전 수출 중심으로 이뤄진 한국 대기업들의 투자가 한순간에 과잉투자가 돼버렸다는 점이다. 첨단 제조업, 고급 서비스업을 집중 육성하며 부실 부문을 털어내는 과감한 산업 구조조정 외에 미래세대의 일자리를 지킬 수 있는 대안은 있을 수 없다.
정부와 함께 이런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20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닷새 남았다. 새누리당의 한국형 양적완화 방안 정도를 빼면 온통 청년, 고령자, 지역 유권자에게 ‘뭘 더 준다’는 선심성 공약들뿐이다. 문혁 같은 일이 다시 터지길 바랄 수도 없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