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로클로스에게 붕대를 감아 주는 아킬레우스.
죽음까지 넘나드는 이 강렬한 우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곧 동성애라는 것을 우리는 플라톤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남자들 간의 지성적인 사랑이 젊은이에게 분별력을 심어주어, 불명예스러운 일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명예로운 일에 몸 바칠 줄 아는 인간으로 키워준다고 했다. 이런 덕성이 국가나 개인의 차원에서 위대하고 훌륭한 일을 성취하는 원동력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아킬레우스의 고사를 인용했다. 헥토르를 죽이지 않으면 집에 돌아와 천수를 누릴 것이라고 어머니가 예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애자(愛者) 파트로클로스를 도와주러 전장으로 나갔고,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헥토르를 죽임으로써 그 복수를 하였으며, 마침내 애자의 뒤를 따라 용감하게 최후를 마쳤다(‘향연’). 소년애와 애지(愛知·philosophy)라는 두 관습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구절에서는 고대 그리스에서 동성애가 단순히 성적인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지위에까지 올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성애자인 푸코가 말년에 왜 그토록 고대 그리스에 심취했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최근 한 필자가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관계를 동성애가 아닌 단순한 우정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머리가 갸우뚱해졌다. 그는 두 역사적 인물의 관계를 동성애로 의심하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에로틱한 욕망으로 몰고 가는, 현대의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통념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근대와 더불어 ‘사회적 관계로서의 우정’은 사라지고 동성애를 사회 문제로 취급하는 현상만 남았다는 푸코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나 푸코가 말한 ‘우정’은 동성애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동성애 안에 들어있는 남성들 간의 우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성애가 상류층 남자들 사이에 만연했던 것은 자본주의라는 말조차 없던 고대 그리스에서였다. 조그만 왜곡들이 모여 거대한 자본주의 비판으로 이어지지 않을지 걱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