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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고독을 부르는 공간의 사회학

입력 | 2016-04-09 03:00:00

<上>골목길이 커뮤니티 활성화 좌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사진) 속의 이웃들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매일 얼굴을 맞대며 미주알고주알 속사정을 털어놓았고 갈등이 생겨도 금세 풀었다. 사람냄새 나는 그 시절, 어른들은 동네 평상에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눴고, 아이들의 운동장은 그 주변이었다.

한국 사회는 1970, 8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에 비례해 급변했다. 핵가족화가 진행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했다. 사람들은 “산업화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건축학계의 시선은 조금 다르다. 길의 형태, 그리고 인접한 다른 길과의 연결성에 따라 이웃, 나아가 사회와의 교류가 달라진다고 본다.

동아일보는 세종대 스페이스신택스연구소와 함께 서울지역 길이 1km 이내의 ‘생활권’ 도로와 인도 전체를 분석했다. 그 결과 동네 길은 상당수 파괴되거나 사라진 상태였다. 이웃과 점점 얼굴 맞대기가 어려워지는 셈이다.


▼ 아파트 개발로 사라진 동네길… 이웃사이 교류도 끊어져 ▼


동아일보 취재팀과 세종대 스페이스신택스연구소의 공동 분석 결과 서울에서 동네 길이 가장 잘 보존된 지역은 성북구 정릉동·돈암동, 도봉구 쌍문동·방학동, 강북구 미아동, 중랑구 면목동, 동대문구 제기동, 서대문구 남가좌동 등이다. 스페이스신택스연구소는 도시와 건축물의 공간 구조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더 나은 삶의 방향을 연구하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주민끼리의 의사소통이 활발했고 마을 사업도 활기를 띠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도시 개발에서 비켜나 낙후된 지역으로 치부되지만 ‘사람 냄새’가 더 나고, 건강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강남이 개발되면서 격자형 간선도로가 뻗은 역삼동 테헤란로 뒷골목 주택가는 고립도가 높았다. 최근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초고층 아파트 단지도 내부의 길은 주민 간 교류를 현격히 떨어뜨리는 구조인 것으로 나타났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와 쭉쭉 뻗은 간선도로 위주의 도시 설계가 기존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길을 없애면서 동네 안 커뮤니티까지 파괴한 것이다.

만약 사람을 마주치기 좋은 길에 산다면 이웃과의 관계도 달라질 수 있을까. 취재팀은 동네 길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정릉동과 그렇지 않은 마포구 성산동의 한 아파트 단지 주민을 대상으로 각각 ‘내 이웃을 소개합니다’라는 실험을 진행했다. 일종의 이웃 관계망(網) 조사다. 동네에서 친화력이 있는 사람을 1번, 즉 ‘마스터 이웃’으로 지정한 뒤 자신이 아는 이웃 사람을 차례로 소개받는 방식이다. 2번→3번→4번으로 이어지는 릴레이 이웃 소개가 몇 번까지 계속되는지 살펴봤다.



“저랑 친한 ○○이 엄마는요”… 이웃 관계망 조사해 보니

“우리 동네는 이웃끼리 우애가 있으니 계속 연결될 것 같은데….”(김경숙·56·여·정릉동)

“이 아파트에선 서로 모르면 둘 중 하나가 간첩이지.”(박금순·59·여·성산동)

서울 성북구 정릉동엔 이처럼 차가 다니기에 비좁은 골목길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걸어서 이 길을 걷다 보면 주민끼리 서로 마주쳐 인사를 나눌 기회가 많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지난달 17일 만난 두 지역의 마스터 이웃은 자신만만했다. ‘정릉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이끌고 있는 김 씨는 권계숙 씨(67·여)를 소개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도자기 만들기를 배우는 목요일 모임이 있는데 그곳에서 자주 본다는 게 이유였다. 바통은 1983년 정릉동으로 시집온 이미성 씨(58·여)에게 넘어갔다. 이 씨는 시부모님이 살던 곳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뒤 줄곧 정릉동에서 살았다.

이름은 몰라도 교류의 끈은 이어졌다. ‘정육점 아저씨’, ‘북악당 아저씨’, ‘헤어살롱 아줌마’처럼 장소가 이름을 대신하거나 ‘지명이 엄마’, ‘윤주 엄마’처럼 자녀의 이름으로 이웃을 기억하기도 했다. 조사는 30번으로 끝났다. 마스터 이웃이던 김경숙 씨는 “인사하고 지내는 이웃은 더 많은데 직장에 나가 집에 없는 이가 적지 않아 더 길게 이어가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성산동의 한 아파트단지에서는 부녀회장인 박금순 씨부터 출발해 11번째에서 끝났다. 다시 통장과 노인회장 두 명을 기준으로 실험을 해 봤지만 이웃 소개는 각각 7번째, 3번째에서 더 이어지지 못했다. 이웃끼리 알고 지내는 관계망의 크기가 정릉동에 훨씬 못 미친 것이다.

주상복합건물인 서울 종로구 A아파트도 비슷했다. 젊은 맞벌이 부부가 많아 서로 얼굴조차 모르는 이웃이 수두룩했다. 그나마 발이 넓을 것 같은 마스터 이웃을 선정해 실험을 해봤지만 2, 3명 옆집을 소개하다 금세 끊겼다.



그 동네엔 잘 모이는 비결이 있다

이웃 관계망이 탄탄한 동네는 무엇이 다를까. 주민들은 “동네 구조상 이웃집이 보인다”고 말한다. 80가구가 모두 서로 알고 지낸다는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은 골목길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골목길을 오를 때 다른 집 대문이 차례로 보인다. 골목길을 오르내리다 대문을 열고 나오는 이웃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눌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30년 이상 산 우주봉 씨(72)는 “이웃끼리 얼굴을 자주 보다 보니 근황을 주고받게 되고 큰일이라도 생기면 옆집에서 금세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고 했다.

도시 한옥이 많은 정릉동 단독주택가 역시 골목길을 따라 이웃집 대문을 마주 보는 방식이다. 마을버스를 타러 내려가거나 큰길로 나가려면 수많은 이웃과 마주친다.

동네 사람들을 융화시킬 수 있는 구심점인 마스터 이웃의 존재 역시 중요했다. 김경숙 씨는 정릉동에 산 지 7년밖에 되지 않는다. 20년 이상 거주한 터줏대감 동네 어르신이 많지만 김 씨는 ‘중간 허리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그의 스마트폰 전화번호부에는 이웃 100여 명의 전화번호가 있다. 동네 사정에 밝은 또 다른 마스터 이웃 김효순(63·여), 이명희 씨(57·여)의 이웃관계망까지 합치면 인근 주민들의 대소사를 내 일처럼 챙길 수 있다.

공통 관심사가 있다는 점도 관계망을 튼실하게 만들어 줬다. 정릉동 단독주택가에는 꽃을 좋아하는 주민이 많다 보니 ‘집 앞에 꽃을 심어 보자’는 의견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하나둘 집 앞을 가꾸기 시작했고 동네 길이 아름다워졌다. 그러자 “아예 각자 집 정원도 개방해 보면 어떠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정릉동 이웃들은 2014년부터 매년 봄가을 한 번씩 자신의 정원을 공개하고 차도 대접하는 정원 축제를 열고 있다.



‘만남의 장소’까지 있다면 금상첨화

서울 종로구 통인시장 입구에 있는 마을 정자는 이 일대 골목길 다섯 개가 만나는 곳에 있다. 이곳에서 주민들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어울려 대화를 나눈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사람들이 자주 마주치는 길에 특정 구조물이 있으면 동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종로구 통인시장 입구에 있는 마을 정자가 그렇다. 이곳은 자하문7길과 옥인동길이 마주치는 데다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어 동네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고 자연히 문방구점, 소아과 병원, 빵집 등이 포진하고 있다. 종로구는 이 다섯 갈래 골목길이 만나는 곳을 주차장으로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닥을 높이고 20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정자를 세웠다. 만남의 장(場)을 만들어 준 것이다.

2일 통인시장 입구 정자를 찾았다. 정자에 앉은 사람들은 말 그대로 ‘남녀노소’ 각양각색이었다. 옥인문방구점에서 뽑기 놀이를 한 아이들은 정자 바닥에 장난감을 펼쳐 놓고 서로 “내 것이 좋다”며 자랑하고 있었다. 한 부부는 빵집에서 단팥빵을 사들고 이곳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옆에 앉은 아기가 보채는 통에 엄마가 진땀을 흘리자, 한 할머니가 “힘들 때지만 제일 예쁠 때예요, 아기 엄마 힘내요”라며 말을 건넸다. 정자는 아이들 놀이터에서 주부들의 수다 장소로, 다시 어른들의 마실 공간으로 하루 종일 변신했다.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주변의 상권도 활기를 띠었다.

이웃 관계망 조사에서 소개가 오래 이어지지 못했던 곳의 주민들은 “서로 마주치는 장소가 주차장 외에는 특별히 없다”고 입을 모았다. 반포 K아파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차량이 늘면서 주차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중 삼중 주차가 불가피해지면서 사람들은 차에 길을 내주고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마포의 한 아파트단지 주민들은 “상가(부녀회)와 종합복지센터(노인회) 등으로 모이는 장소가 나뉘다 보니 교류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김영욱 스페이스신택스연구소장(세종대 건축학과)은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교류 정도가 바뀐다”며 “외로움을 부르는 주거문화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노지현 isityou@donga.com·김재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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