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행복원정대/초등 고학년의 행복 찾는 길]<2> 남학생보다 우울한 딸들
《 초등학교 5학년생 은지는 엄마에게 “나무랄 데 없는 딸”이다. 하지만 은지는 “난 100점 만점에 30점짜리”라고 했다. “딱히 뒤처진 건 아니지만 그냥 모든 분야에서 부족한 것 같아요. 성적이나 외모, 인기 같은 거…. 뭐 하나 확 뛰어난 게 없으니까요. 최고가 되고 싶은데….” 》
○ ‘알파걸 스트레스’ 겪는 아이들
집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딸”이라고 자랑스러워한다. 학교에선 “남학생들보다 나은 모범생”이라며 칭찬받는다. 모든 면에서첫째간다는 뜻에서 ‘알파걸’이라 불리는 10대 초등 여학생들. 하지만 ‘알파걸’들은 또래 남자아이들에 비해 덜 행복하다. 서울에사는 초등 4∼6학년 남녀 학생 64명과 그 어머니 64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여학생들은 스스로 “최고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도자신감이 없고, 부모의 기대와 친구 관계의 미묘함을 버거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딸 둔 어머니들은 “딸에게 더 기대하고, 더엄격해지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는 건 은지만이 아니다. 심층인터뷰에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문항에 여학생들은 3.97점, 남학생은 4.06점을 주었다(5점 척도). ‘나는 좋은 자녀다’에 대해 여학생들은 3.97점, 남학생은 4.00으로 여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 “여학생은 초등성적이 대학까지 간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사는 5학년 서현이는 최근 엄마의 권유에 따라 학원 수업을 3개에서 4개로 늘려 오후 10시가 돼야 집에 돌아온다. 성적이 떨어졌기 때문은 아니다. 서현이 엄마는 “지금까진 상위권이지만 초등학교 땐 원래 여자아이들이 잘한다. 남자아이들은 나중에 뒤집기가 가능한데 딸은 그게 어려우니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3학년 때 학교 영재로 뽑혀 주말마다 영재 교육을 받았던 재은이(서울 양천구 목동)는 4학년이 돼 다시 치른 영재 선발 시험에서 떨어졌다. 재은이는 “주말에 친구들과 놀 수 있어 좋지만 엄마가 서운해해서 미안했다”며 “하지만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고 했다.
○ 조숙한 알파걸, ‘남의 시선’에 민감
또래 남자아이들에 비해 사춘기를 빨리 겪는 여학생들은 신체 변화에 따른 스트레스도 그만큼 심하다.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사는 6학년 하연이는 갑작스레 찾아온 몸의 변화가 당황스럽다고 했다.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으면 귀찮은 일도 없고, 외모 때문에 고민을 안 해도 될 텐데 힘드네요.”
같은 또래 아영이(서울 마포구 도화동)는 150cm대 초반에서 맴돌고 있는 키가 걱정이다. 우유를 많이 마시고 줄넘기도 열심히 하지만 “생리를 시작하기 전에 키가 더 커야 할 텐데 걱정”이라고 했다. “엄마랑 키 크는 주사를 맞을까 얘기한 적도 있어요. 제가 바라는 목표는 169cm에 49kg이에요.”
관계지향적인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에 비해 타인의 시선을 더 많이 의식한다. 이들은 특히 친구들의 평가를 중시한다.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고학년 여자아이들은 이합집산이 활발하다. 끊임없이 서로를 평가하고 무리 짓기를 하다 보니 타인의 시선을 더 의식하게 되는 것 같다”고 전했다. 또 다른 교사는 “학교 밖에서도 끊임없이 소셜미디어 대화방을 만들어 소통하다 보니 또래 집단의 평가는 예전보다 더욱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이는 심층 인터뷰에서 수치로도 확인됐다. 여학생들은 ‘나는 좋은 친구다’라는 문항에 4.11점을 주었다. 남학생 점수는 4.38점이었다.
장근영 청소년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여성은 남성과 달리 사회화 과정에서 자신을 선택받는 존재로 생각하도록 훈련받는다”면서 “딸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갖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